준비되지 않은 임신, 벼랑 끝 산모…“국가 보장 필요한 때”
법조계·의료계·시민단체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 한 목소리
#이주 여성 A씨는 한국 남성과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 A씨는 최근 임신 8주차에 접어든 사실을 알게 됐지만 더 이상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것 같아 임신중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A씨는 남편의 폭력이 두려워 임신중지를 원한다고 털어놓지 못했고, 홀로 산부인과를 전전하다가 “남편과 함께 와야 한다”는 의료진의 말 앞에 좌절하고 말았다.
#고등학생인 B양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이후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지인과 동거생활 중 임신을 하게 됐다. B양은 부모에게도, 상대 남성에게도 임신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보호자가 없다”며 거절당했고, 결국 임신중지 시술이 불가능한 임신 20주차에 이르렀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선고를 받은 지 5년. 임신중지는 ‘범죄가 아니다’라는 결정이 났지만 관련 입법은 제자리다. 사회적·경제적·의료적 문제로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합법적 지원을 받지 못해 벼랑 끝에 놓여있다. 전문가들은 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적 보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낙태를 왜 하는 건가요?” 시민단체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를 운영하는 나영 대표는 몇 달 전 보호출산제 관련 인터뷰 중 이 같은 질문을 받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선고를 받은 지 5년이 지났음에도, 임신중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했다.
나 대표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임신중지 비범죄화 후속 보건의료 체계 구축과 권리보장 입법 촉구’ 법조계·의료계·시민사회 공동 기자간담회에서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상황과 맥락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라며 “임신 유지와 출산만을 지원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임신중지에 대한 지원 체계가 빈약할수록 임신중지 시기는 늦어지고, 접근성은 낮아진다”며 “결국 당사자는 더 많은 비용과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나 대표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임신중지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와 서비스 등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대표에 따르면 최근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뉴질랜드, 캐나다 등 여러 국가에서 임신 주차에 따른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추세다. 임신 몇 주차에는 어떤 시술법이 안전하고 어떤 의료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지 등 시기별 필요한 정보와 상담, 지원책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함이다.
나 대표는 “WHO는 2022년 모든 국가에 임신중지에 대한 완전한 비범죄화를 권고했다.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비공식적이고 비싼 비용으로 이뤄지던 의료 환경을 바꿔 양질의 안전한 보건의료 체계를 마련해가고 있다”며 “한국도 보건복지부가 중심이 돼 임신중지에 대한 공식 정보 제공 시스템, 보건의료 연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의료 현장에서도 임신중지 관련 입법 부재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건강상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임신중지를 합법적인 ‘의료서비스’로 바꾸기 위한 정책적 개선이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은 “헌법불합치 선고 이후 낙태죄가 사라졌음에도 보호자 동의를 받게 하고 비급여 약제를 쓰게 하는 등 이전 관행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면서 “낙인과 부정적 고정관념이 진료를 지연시키고, 비용을 키워 건강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여성 4명 중 1명이 임신중지를 하는 게 현실이다. 피임, 자연유산과 같이 임신중지도 하나의 의료서비스로 여겨야 한다”며 “해외 사례를 살펴보고 여성 건강과 관련해 어떤 서비스가 필요하고, 어떤 지원책이 뒷받침돼야 할지 적극 고민해야 할 때다”라고 피력했다.
고경심 살림의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해외직구로 불법 유산유도제가 구입되고,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은 가짜 약물에 따른 피해가 벌어지고 있다”며 “일부 산부인과는 고가의 유산유도제 또는 수술을 제안해 경제적 접근성도 제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 전문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의사들도 적절한 전문적 훈련을 취하고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며 “임신중지를 필수의료서비스로 규정하고 보험급여 체제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라고 전했다.
법조계에서도 임신중지를 정상적 의료행위로 정의하고 여성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입법 마련이 이뤄져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낙태죄를 폐지한 국가들은 임신중지에 대해 사유나 임신기간 등을 이유로 처벌을 남겨두지 않고 오직 의료적 문제로 접근하며, 건강보험이나 공공의료에서 임신중지 비용을 지원해 다른 의료와 차별성을 없애고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는 임신중지가 일반적 의료 행위로 정상화될 수 있도록 당장 정책을 시행하고 필요한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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