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사] 우리의 인생 목적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역사상 전무후무한 2024년 10월 14일 월요입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영광스럽고 놀라운 날을 기대합니다.
오늘자 주요 기독 뉴스를 말씀 드릴게요. 우선 우리나라 대학 캠퍼스에 재학생을 중심으로 한 예배공동체 세우기 운동이 눈길을 끌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채플이나 선교단체의 일상적 모임이 아니라 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지고 있다는 게 특징입니다. 미션스쿨뿐 아니라 일반사립 및 국립대에서도 기독 학생을 주축으로 예배 모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애즈버리대 부흥처럼 이땅의 캠퍼스에서 그 불길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부흥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모임을 이룬 곳에서 한 사람 또는 소수가 회개하고 몇 날 며칠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삶이 변화되고 그렇게 확산되었지요.
중국의 기독교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요. 최근엔 인공지능(AI)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의 박해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중국이나 이란 등에서 AI를 활용한 안면인식 기술을 사용해 종교를 탄압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고 합니다. 종교 박해일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마저 파괴하는 행위여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에서는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 파함을 비롯해 중국에서 독신으로 선교사역을 했던 글래디스 에일워드,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이자 순교자였던 이그나티우스 이야기 등이 전해집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인생의 목적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과연 만사형통을 위해서일까요.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으려 한다면서 꿋꿋이 걸어갔습니다. 고난과 박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파함이 오순절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사역에 힘쓰던 20세기 초 미국 사회는 대 진보의 시대(1870~1920)로 엄청난 사회적 격변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파함은 당시의 진보적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반기를 든 매우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9세에 감리교 목사로 안수를 받은 그는 병약함에도 신앙심이 깊어 어린 시절부터 많은 시간을 성경을 읽는 데 할애했습니다.
그는 캔자스에서 ‘믿음의 치유자’와 설교자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성결파 부흥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당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는 세기말적 종말론과 치유 사역이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몇 년간 파함은 신유의 교리와 실천에 집중했다고 합니다.
파함의 ‘사도적 신앙 운동’(Apostolic Faith Movement)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오순절운동은 캔자스의 베델성경대학에서 그의 학생들에게 성령 세례의 증거를 성경에서 검색하도록 도전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 학교의 유일한 교과서는 성경이었고 기도가 절대적으로 중시되었으며 학생들이 주말에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파함은 1900년 12월 말에 3일간 여행을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성령세례의 성경적 증거를 연구하도록 과제를 주었는데 그들 모두 방언이 성령세례의 증거라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는 사도시대가 끝나도 그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파함은 초대교회의 오순절을 연구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하심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했기에 성경책 외에 다른 교재가 필요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성경 구절을 함께 공부했고 각 구절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기도하며 노력했습니다. 긴 시간의 기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예배,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하는 시간이 날마다 채워졌습니다. 파함은 신약성경의 견해가 사도적 신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연말이 다가올 때 그는 학생들이 사도행전 2장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했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경험에 대한 성경적 증거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파함은 곧 연구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을 현상에서 그치지 않고 확고한 오순절의 교리로서 확립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방언을 받은 첫 인물은 1901년 중국어로 방언을 받은 아그네스 오즈만이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는 12명의 베델성경학교 학생들이 성령세례의 증거로 각각 다른 언어로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 후 파함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는 방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1902년 런던의 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에일워드는 14살 나이에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생활고를 이겨야 했습니다. 20대 때는 방탕한 생활에 빠지기도 했는데 한 낯선 사람과 만나고서야 신앙고백을 하게 됐고 선교사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 중국내지선교회의 문을 두드렸고 견습기간이 끝났지만 선교사로 파송받지 못했습니다. 심각한 학습 장애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푼돈이 모일 때마다 기차역 승차권 판매원에게 돈을 맡겨두었습니다. 당시 중국으로 가는 길은 기차편으로 유럽과 러시아, 시베리아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중국 관련 서적을 읽으며 공부했고 이 과정에서 지니 로슨이란 과부이자 중국 선교사를 알게 됩니다. 로슨은 자신의 사역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32년 10월 15일 리버풀역에서 중국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국경에서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에일워드는 시베리아 찬바람 속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불빛고 온기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만주행 기차를 탔지만 곧장 중국으로 가지 못하고 일본으로 가서 영국 영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양청에서는 로슨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로슨은 에일워드에게 양청을 경유하는 노새 마부들을 위한 여관을 운영하는 일이었습니다. 로슨에겐 마부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에일워드에겐 힘든 노동일 뿐이었습니다. 이후 로슨이 죽고 여관 사역이 어렵게 됐는데 마치 양청 지사가 에일워드에게 그 지역 여인들의 발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성들의 전족을 금지하는 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그녀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녀의 사역을 꽃을 피웠습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보러 나왔고 성경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에일워드의 명성도 높아졌습니다.
그즈음 마오쩌둥은 혁명군을 조직하고 있었고 일본은 만주 국경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었습니다. 1937년 일본의 폭격이 시작됐고 에일워드는 전쟁에도 현장을 지켰습니다. 그녀는 38년까지 마지막 사상자의 피해가 확인될 때까지 양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에일워드는 전쟁 통에 고아를 돌봤습니다. 나인펜스라는 아이가 첫 아이였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작은 여자아이를 9펜스에 샀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름이 됐습니다. 에일워드는 아이들을 더 입양했고 1940년에는 100여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안전한 땅으로 이동했습니다.
청두에 정착한 그녀는 중국내지선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지냈고 한 지역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일했습니다. 전도부인은 중국 여성들이 맡던 일이었는데 그녀는 초라한 직분을 영광으로 여겼고 전도와 구제사역으로 교회를 섬겼습니다. 1949년 중국 선교 20년 만에 휴가를 떠난 그녀는 영국에서 어머니의 자랑이 되어 강연을 다녔고 전기(‘작은 여인’)와 영화, BBC 방송 출연(‘이것이 그대의 삶’)을 통해 국제적 유명 인사가 됐습니다. 57년 다시 복귀해 대만에 정착해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도 만찬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59년 10월 16일 전투적인 메시아적 노예제 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이 약 2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현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있는 연방 무기고를 습격합니다. 브라운은 폭력적인 행동만이 노예제를 종식시킬 수 있으며, 대규모 노예 봉기가 회개하지 않는 미국 남부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조국의 죄를 씻을 자로 기름 부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퍼스 페리 주변의 노예들이 브라운의 대의에 동조하지 않자 그는 제압당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AD 30~3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그의 편지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사자’로 불렀습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가 체포된 것은 안디옥교회 내에 몇 개의 분파가 있었으며 이그나티우스는 그가 이단적이라고 생각했던 교리를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어쨌든 유죄 판결을 받아 로마로 압송, 처형을 받습니다.
로마로 가는 도중 그는 그리스도인들과 면회를 했는데 그가 남긴 편지는 이러한 면회의 결과였습니다. 에베소교회에서는 오네시무스(오네시모) 감독이 이끄는 일단의 사절을 만났는데 이 오네시무스는 사도바울의 빌레몬서에 나타난 노예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신자들이 그를 구출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그나티우스는 이런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은 자신의 목숨으로 신앙을 지킬 각오가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기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런 희생을 통해 진정한 제자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로마의 신자들에게 부탁한 것은 그가 용기 있게 이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더 이상 육신의 양식을 탐하지 않는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신 하나님의 떡을 맛보기 원한다…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그의 보혈을 마시기를 원한다.…나는 하나님의 밀알이니, 짐승의 이빨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1685년 10월 18일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프랑스 개신교도)의 예배를 다시 한 번 금지하는 퐁텐블뤼 칙령을 발표합니다.
1867년 10월 18일 미국이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 즉 에이커당 약 2센트에 매입합니다. 10년 후, 느슨한 군사 행정으로 인해 알래스카의 도덕적 상태가 악화되자 알래스카에 주둔한 한 육군 사병은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참된 우리로 모을 수 있는 목자를 보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장로교 선교사 쉘든 잭슨은 그 요청에 응답해 수십 년 동안 기금을 모으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더 나은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더 미션에 접속하세요! 어제보다 좋은 오늘이 열립니다 [더미션 바로가기]
- “기독교인은 기독교 개종자 아닌 예수의 도제”
- 하트풀리… 프레이… 설교 중 갑툭튀 영어 집중도 해친다
- 기적의 치유 간증… 기독인 일상 공유… “SNS, 복음 파종 도구”
- “목사·청년·헌금 3無 제자교육 꿈 못꿔”… 섬 사역 고충 나눈다
- 성경으로 무장한 평범한 성도들은 언제나 강하다
- 셀린 송 감독 “‘기생충’ 덕분에 한국적 영화 전세계에 받아들여져”
- “태아 살리는 일은 모두의 몫, 생명 존중 문화부터”
- ‘2024 설 가정예배’ 키워드는 ‘믿음의 가정과 감사’
- 내년 의대 정원 2천명 늘린다…27년 만에 이뤄진 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