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칼럼] 당정 갈등, 너무나 한국적인 정치 퇴행
찰리 채플린의 원근법 얘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원근법을 뒤집어 보면 요즘 대통령실과 여당 대표가 지루하게 이어가는 당정 갈등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미시적으로 보면 윤-한 갈등은 권력자들끼리 벌이는 한시적 정치 희극이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한국 대통령제의 무기력과 퇴행이 드러나는 비극이다.
근접해서 보면 당정 갈등은 사소한 밀당의 희극이다. 둘이서만 만나는가, 여럿이 만나는가, 누가 먼저 연락을 취했는가 등의 사소함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다. 게다가 수십 년간 동고동락해온 선후배가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자리에 마주 서서 벌이는 권력 갈등이니만큼 그 자체가 관심거리이다. 아울러 의외의 조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면서 예상 밖 반전이 이어진다. 이 갈등이 어디까지 확산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관객들이 눈을 떼기 어려운 권력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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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 사례 거의 없는 한국적 현상
권력분산 명분의 이원 권력 체제
현실은 권력 운용 주체들 역부족
제도보다 문화·관습이 정착돼야
」
하지만 좀 더 멀리서 바라보면 요즘의 당정 갈등은 대다수 대통령제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한국적인 권력 다툼이다. 제왕적 대통령-당 총재 겸임이라는 구모델을 넘어서려는 권력 분산의 실험이었지만 그 실험은 실패한 듯하다. 달리 말해 지금의 당정 갈등은 권력 분산의 제도를 운용할 정치문화가 전혀 자리 잡지 못한 우리 대통령제의 무기력,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상징하고 있다.
먼저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갈등하는 한국적 현상의 뿌리부터 살펴보자. 우리에게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당 대표의 갈등을 비롯하여 당정 갈등은 사뭇 익숙한 관습이다.
하지만 대표적 대통령 중심제 국가인 미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현직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갈등이란 매우 낯선 얘기이다. 우리네 여당의 당 대표에게 해당할 만한 직위로서 당 전국위원회 의장 등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일 뿐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정치적 자원을 소모하는 갈등을 벌이고, 그 결과로 정책 논의는 뒷전으로 밀려나는 권력 게임은 한국 정치의 고유한 현상이다.
모두 기억하다시피 대통령-여당 대표의 이인삼각 체제의 뿌리는 양 김 시대 제왕적 대통령(당 총재 겸임)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정당을 제왕적으로 지배하던 김영삼, 김대중 총재가 각각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여당의 공천, 자금 등이 모두 제왕적 대통령의 관할이던 시대가 있었다.
이후 양 김 대통령의 퇴장과 더불어 정당의 민주화, 개방화 바람이 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평당원화, 당 대표 선출에 당원과 여론의 뜻이 반영되는 절차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나름의 독자적 정당성을 갖는 당 대표가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행정부를 이끌고 여당 대표는 당을 이끈다는 아름다운 권력 분산은 현실에선 작동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권력자원이 상대적으로 넉넉하던 임기 전반 2년여 동안 당정 관계는 대통령실의 독주 체제였다. 여당 대표는 대통령과의 갈등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숨 가쁘게 교체되어왔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임기가 중간 반환점 부근에 오고 지지율이 20% 선에 머무는 현상이 지속되면서 대통령-여당 대표의 관계는 본격적 갈등으로 들어서고 있다. 권력이 있는 곳에 권력투쟁이 있게 마련이지만, 정치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저 한국 민주정치의 미성숙의 한 단면일 뿐이다. 민주화의 역사가 40년 가까이 흐르고 있지만, 당정 관계는 대통령 임기 초반에는 대통령에 의한 유사(類似) 제왕적 지배가 이뤄지다가 임기 후반에는 지리멸렬한 갈등의 폭발로 이어지는 냉탕-열탕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무능력의 핵심은 제도·절차는 대체로 정돈되어 있지만 일상적으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이끌어가는 민주주의의 습속과 문화는 우리 사회에 전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대통령의 평당원화, 당원-지지자들의 기반을 가진 당 대표라는 이원적 권력 체제를 도입하였다면, 이러한 제도의 성패는 대통령실과 여당 대표의 민주적 운영 능력이 좌우하기 마련이다. 설사 감정의 골이 깊어도, 정치적 목표가 서로 달라도, 대화와 소통으로 정책 결과를 산출하라는 것이 권력 분산의 목표였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판이하다. 의료 갈등이 당정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오히려 의료 위기의 해법은 더욱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결국 당정 갈등이라는 희비극을 통해 우리는 민주정치의 오래된 교훈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제도의 도입은 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제도의 운용은 훨씬 더 성숙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20년 전 당정 간에 권력 분산 장치들이 도입될 때 그 뜻은 그럴싸해 보였다. 전문가도, 언론도, 모두 손뼉 치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확인된 것은 우리 정치는 권력 분산을 운영할 역량도, 의식도 갖추지 못했다는 씁쓸한 현실뿐이다.
장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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