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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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의 어느 길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던 여고생을 '묻지마 살해'한 박대성.
최근 대통령 관저 공사를 총괄했던 김오진 전 국토교통부 1차관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관저 공사에 수의계약으로 참여한 인테리어 업체 '21그램'을 누가 추천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김건희 여사가 추천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한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그래서 일단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얼버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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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의 어느 길거리에서 일면식도 없던 여고생을 ‘묻지마 살해’한 박대성. 범행 직후 CCTV에 포착된 그의 모습은 만족감을 드러내듯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런 박대성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여느 범죄자들과 같이 ‘술에 취해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은 범죄자만 하는 게 아니다. 물의를 빚은 연예인이나 정치인, 고위공직자 등 유명인들도 곤란한 상황이 오면 정해진 정답처럼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한다. 최근 대통령 관저 공사를 총괄했던 김오진 전 국토교통부 1차관도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관저 공사에 수의계약으로 참여한 인테리어 업체 ‘21그램’을 누가 추천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김건희 여사가 추천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한 바 있다.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진술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재판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판단을 받기 위한 목적이 있을 것이고, 정치·경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모종의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혹은 술이나 마약에 취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진짜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법정에서 한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당사자가 법정에서 하는 진술은 인정, 침묵, 부인, 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은 부지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부지의 진술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데 나름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담당 판사 입장에서 당사자가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인하면 여러 증거와 비교하여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기억나지 않습니다’라고 부지의 진술을 하면 당사자가 고의성을 가지고 한 행위인지, 과실로 한 행위인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고 한 행위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더욱이 제출된 증거들이 모호해서 증거들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울수록 부지의 진술이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특히 형사재판에서 피고인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진술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인 사건의 경우는 이런 소송상의 이점뿐만 아니라 마녀사냥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인다. 유명인의 공개재판은 언론의 주목을 받기 마련인데, 자칫 부인했다가 마녀사냥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단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얼버무리는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 모 정치 브로커와 관련하여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이 넘친다.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정치인들도 본능적으로 기억나서는 안 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중요한 일, 때로는 사소한 일조차 기억하고 사는 평범한 우리는 자기가 한 일, 어쩌면 잊기 어려운 일조차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라의 중대사를 맡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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