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서 고백에 기마경찰 출동까지... '정년이'가 못 담은 이것
[김종성 기자]
▲ 드라마 <정년이> 속 한 장면 |
ⓒ tvN |
멜로 영화가 인기를 끈 이 해에, 멜로 작품이 상당수 포함됐던 과거의 여성 창극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기사가 나왔다. 그해 7월 21일 자 <한겨레> 15면 상단에 보도된 '여성극극을 아시나요?'라는 기사다.
이 기사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 한국적 뮤지컬을 선보여온 학전(대표 김민기)이 오는 8월 4일~9월 13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에 여성국극 <진진의 사랑>을 올린다"라며 여성국극을 아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면서 "우리 음악과 소리, 춤 등 전통 양식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 국극이라며 이것이 "한국 뮤지컬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을 실었다.
1998년 당시 여성국극은 낯선 존재였지만, 오래 전 한때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런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12일부터 tvN에서 방송되고 있는 <정년이>다.
▲ 드라마 <정년이> 속 한 장면 |
ⓒ tvN |
칼 도마로 쓰는 나무 그루터기 위로 뛰어오른 그는 갑자기 공연을 시작한다. "남원산성 올라가 / 이화 문전 바라보니 /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 떴다 봐라 저 종달새" 하며 <남원산성가>를 불러댄다.
깜짝 공연으로 시장 상인들과 행인들은 물론이고 깡패들도 노랫소리에 집중하게 됐다. 군중이 일체화되는 이 분위기는 건달들의 패악질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공연차 목포를 방문했다가 때마침 이를 목격한 여성국극 스타 문옥경(정은채 분)이 정년에게 접근해 거리 공연이 아닌 극장 공연의 길로 인도하는 모습이 제1회에서 방영됐다.
2001년에 <고전희곡연구> 제3집에 실린 백현미 이화여대 강사의 논문 '한국 창극의 역사와 민족극적 특성'은 창극과 국극과 가극이 동일한 분야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한 뒤 "판소리를 바탕으로 창극이 만들어지게 된 것은 1900년대 초반의 문화적 변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라며 이런 설명을 한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극장인 협률사가 설립되었고 1907년을 전후해서 단성사·연흥사·장안사 등의 사설 극장이 속속 설립되면서 이른바 극장 문화가 보다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공연의 주 무대가 극장으로 옮겨가는 추세 속에서 창극이 자리를 잡았다. 바닷가와 시장에서 노래 부르던 윤정년이 극장 배우의 길을 걷는 모습은 창극과 관련된 이런 변화를 떠올리게 해준다.
2008년에 <낭만음악> 제20권 제3호에 수록된 주성혜의 '전통예술로서의 여성국극'은 "김소희와 박귀희, 박록주 등 판소리 명창들이 모여 여창들로만 구성된 창극을 처음 무대에 올린 것은 1948년 10월"이라고 한 뒤 "1950년대 내내 여성국극단은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고 평한다.
지난해 <한국예술문화연구> 제3권 제1호에 게재된 남경호 한국사회문화예술진흥원 이사장의 논문 '여성국극의 재기 노력과 발전 과제'는 김소희·박귀희·박록주 등이 "남성 국악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국악계의 현실에 반발"해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다고 한 뒤 이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임춘앵이 1952년 여성국악동호회를 탈퇴하고 나와 여성국악동지사를 조직해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김진진의 진경여성국극단, 김경애의 새한국극단, 박만호의 보람국극단 등 30여 개의 국극단이 활동하여 인기를 누렸다."
여성국극이 대중의 호응을 얻은 배경과 관련해 위 주성혜 논문은 "외국 영화의 배급과 국산영화 제작이 일시 중단되었던 피난 시절 이후 봉건적인 낭만세계에 대한 동경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라며 "여성이 남장하는 데서 오는 매력과 일부 남자 명창들의 월북도 여성국극의 번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지적된다"고 부연했다.
▲ 드라마 <정년이> 속 한 장면 |
ⓒ tvN |
<정년이> 제1회는 문옥경의 호동왕자 연기에 열광하는 목포 관객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열광적인 팬심은 1950년대 실제 상황보다 못한 편이다.
1991년 3월 30일 자 <경향신문> '국극여왕 김진진 여사 민중의 가슴엔 국극 향수 아직도'에 따르면, 1998년에 학전이 선보인 '진진의 사랑'의 모델인 김진진(본명 김인수)의 인기는 오늘날의 K-팝 스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등포여고를 졸업한 뒤인 1952년에 19세 나이로 임춘앵 극단의 <공주궁의 비밀>에 주연으로 발탁된 그가 그 후에 구가한 인기를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연이 끝났어도 관객들은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살인적 인파를 피하기 위해 몇 시간씩 극장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극성 남자팬들의 혈서 편지를 하루에도 몇 통씩 분장실에서 받아야 했다."
여성국극 팬들은 스타의 집에까지 몰려들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쏟아붓는 물벼락을 맞으면서도 소년·소녀들은 그녀의 집 주위를 맴돌았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고 물벼락을 붓는데도 팬들이 밀려든 것이다.
극장과 그 주변에 '살인적 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했다. 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일도 있었다. 주성혜 논문은 2003년에 나온 한승연의 <꽃이 지기 전에>를 근거로 "공연 후 빨리 빠져나가지 못한 임산부가 극장 안에서 아이를 낳기도 했다"고 말한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가 극장에 갔다는 것 자체가 여성국극의 인기를 실감케 한다.
1950년대에 절정을 구가했던 여성국극은 영화나 텔레비전에 밀리면서 196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 '여성국극을 아시나요?'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갔다. 그랬던 여성국극이 드라마 <정년이>를 계기로 다시 주목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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