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시조' 창간호에 가람 특집
[김삼웅 기자]
▲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
ⓒ (주)CPN문화재방송국 |
1. 가람생가를 찾아서
2. 대표작 20선
3. 일기 20선
4. 자료 발굴, 이병기 시조 9수
5. 이병기 문학론으로 꾸며졌다.
'시조로 큰 가람을 이룬 대인' 제목의 가람 생가 탐방 기사는 "사람이 거처하지 않기 때문에 서울에서 가끔씩 자손들이 내왕하여 관리를 한다니 딱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방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이렇게라도 유지되고 있는 일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늦가을이라서 조금은 덜 쓸쓸하지만 그러나 본체는 지붕이 새어 골이 나 있고, 그 자리에 비닐로 임시방편을 해 놓은 것이 유난히도 안돼 보였다."고 퇴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표작 20선'은 대성암, 박연폭포·만폭동·난초1, 난초2·난초3·난초4, 옥잠화, 꽃, 시름, 그리운 그날이, 시마, 별, 비·2. 한강을 지나며, 매·수선·란, 창, 고상으로 돌아가자. 수우재 등이다.
▲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
ⓒ (주)CPN문화재방송국 |
수 우 재
인자한 그 천성에 뛰어난 효성이오
규모는 엄하시뢰 풍도를 너그럽고
기극한 한고를 겪고 새로 법을 이뤘다
논을 다 몸을 삼고 물트고 뜰을 넙혀
갖은 꽃나무 괴석을 옮겨 두고
고요한 창을 비기어 때로 내려 보시와
산도 들도 아닌 이 골 숨으신 동우거사(東愚居士)
어리석을 우자(愚字)로 그 뜻을 감장하니
이름을 우석우담(愚石愚潭)에 수우재라 하였다. (주석 1)
'일기 23선'의 1946년 11월 1일자이다.
서울대학에 가서 순수문학 강의를 내년 졸업생에게 하였다. 오늘부터 시작, 그들 요청으로 하는 것이다. 국문학연구실에서 김남천 군이 찾아왔다. 그동안 여러 번 찾았다 한다. 문학동맹 부위원장으로 추천했다고 이기영·이태준 군이 삼팔 이북에 갔으니 위원 연명을 하겠다고, 나는 허락을 아니했다. (주석 2)
자료 발굴의 '님'이다. 1925년 7월 13일 작품이다.
님
자나깨나 어느 때에 못 잊을 손 우리님을
보면 별일 없진 마는 아니보면 보고지고
두어라 이런 줄이야 뉘 아닐까 하노라. (주석 3)
'이병기 문학론'은 1)이병기 문학을 쓰는 이유. 2)신념과 기교의 저서. 3)시조적 형식의 이해. 4)'시조다'. 리얼리티에의 접근과 한계. 5)취미의 문학과 문학적 취미. 6)'난초'와 '매화'의 세계. 7)시조적인 일기적인 것. 8)마무리로 구성되었다. 김종은 이 글의 <마무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병기는 무엇보다도 시조가 현대에 갱생하여 흥왕하려면 고시조의 그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가장 확실한 수정(修正)을 가한 한 사람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부터 시작되었던 그의 시조에 대한 논설은 모두가 시조의 맥박과 기능을 재는 진지한 것들이었다. 거기에서 특히 시조의 창작 현재성을 가장 헌걸차게 주장한 <시조는 혁신하자>속에는 "실정실감의 표현"과 "취재범위의 확장"등이 그 구체적인 항목으로 다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같은 그의 주의 주장은 시조가 현대성을 획득하고 문학적 감동력에 나아가는 설득력 있는 통로의 발견이었다. 바로 문학으로서 시조가 "관념과 상투성만 극복하면"이라는 가정 앞에 섰을 때 그것은 리얼리즘의 수준에까지 이르는 적극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쩌랴, '사생(寫生)'이라는 소인성(素人性)에 시조를 묶어둠으로써 그가 추구한 시조광명의 대평원은 한계 앞에 서고 말았다. (주석 4)
주석
1> <겨레시조> 창간호, 189쪽, 겨레 시조사, 1992년 봄호.
2> 앞의 책, 195쪽.
3> 앞의 책, 197쪽.
4> 앞의 책, 212~21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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