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와 숀 코너리가 총격전을? 딥페이크의 경고
[김성호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딥페이크는 인공지능(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사실적인 영상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기존의 합성 수준을 넘어 얼굴과 표정, 목소리까지도 실제처럼 만들어 인간에게 사실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기술로 평가된다.
영화와 드라마, 각종 콘텐츠에 이르기까지 영상 기반의 콘텐츠가 돈이 되는 세상에서 딥페이크는 생태계 전반을 바꿔낼 수 있는 파괴력 있는 기술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이에 창작자며 배우, 콘텐츠 제작업체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그 확장 가능성을 경계하고 탐구하는 것일 테다.
▲ 스틸컷 |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레이첼 매클린의 <오리처럼>은 딥페이크 기술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영화다. 당장 등장하는 건 마릴린 먼로와 숀 코너리다.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듯 침대에서 일어난 둘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숀이 마릴린에게 약물을 주사한다. 말하자면 살해, 흔한 스파이 스릴러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죽음이다.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영화는 숀 코너리 특유의 007을 전성기 모습 그대로 소환해 낸다. 손에 마티니 한 잔을 쥔 채 바에서 시간을 보내려는 찰나, 그의 앞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타난다. 다름 아닌 마릴린, 자신이 방금 전에 죽인 바로 그녀다. 당혹한 숀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정말이지 죽은 여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뿐인가. 마릴린을 살해한 범인으로 숀을 지목하고 추적하겠다는 통에 식은땀이 절로 날 정도가 된다.
▲ 스틸컷 |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곧이어 벌어지는 총격전. 산전수전 다 겪은 007들이지만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 수십 명의 마릴린과 총격전을 벌이며 간신히 도망쳐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숀과 동료들이다. 이들이 차를 잡아타고 도망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고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 건지 의아해질 지경이 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찍어낸 첩보물이다. 말이 첩보물이지 실상은 첩보원 같은 이가 끝없이 쏟아지는 마릴린들과 격전을 펼치고 그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제가 영화 안에 들어있는 가상의 존재란 걸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얼마 없다. 제가 사는 세계가 가상의 세계라도, 그걸 인식하는 순간 실존하는 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뿐이다.
▲ 스틸컷 |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감독은 이야기보다 형식, 즉 딥페이크를 활용해 현실에서는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인물과 상황을 두고 한바탕 놀아보는 데 주력한 듯싶다. 한편으로 영화는 딥페이크 기술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 속 첩보의 핵심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오리다. '만약 그것이 오리처럼 생겼고, 오리처럼 꽥꽥거리고, 오리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오리일 것이다'라는 추론이 영화의 중심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미 우리가 알다시피 딥페이크 기술은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처럼 오인하게끔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사람인 것처럼 가짜 영상을 만들고, 심지어는 유명인 행세까지 하는 것이다. 이제는 실재하지 않는 전성기의 숀 코너리가, 또 이미 죽어버린 마릴린 먼로가 소환돼 연기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아마도 이런 기술과 접점이 없을 반세기 전 사람들에게 이를 내보이면 그야말로 깜짝 놀라 사람이라 믿어버릴 것이 틀림이 없다.
▲ 포스터 |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그렇다고 영화가 AI기술이며 딥페이크에 대해 무조건적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는 이 기술이 완전히 실현되는 순간을 마주한 적 없고, 그 효용 또한 제대로 누려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만 우리가 딥페이크에 대해 인지해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오용될 경우 어떠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근래 발생한 딥페이크 동영상 사건으로 확인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레이첼 매클린은 영국 출신 예술가이며 실험영화 감독이다. 이 시대 실험영화 감독, 또 그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정치와 권력, 소비주의와 디지털 관련 문제 등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관심을 환기하는 작품을 주로 만들어왔다. 그녀의 관심이 딥페이크에 이른 건 어쩌면 필연적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딥페이크는 작가에게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어느 콘텐츠도 복제되고 오용될 수 있음을 알리는 기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배우는 제 얼굴과 목소리, 연기력까지 눈 뜨고 도둑맞을 수 있게 되었고, 감독은 너무나 쉽게 제 오랜 동반자에게 등을 돌리려 눈치만 살피고 있다. 다음은 무엇일까. 그저 기술처럼 보이지만 그저 기술일 수 없는 이 시대 기술들에 대하여, 감독은 답을 구하기 위한 질문을 간절히 던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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