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한국어 공부
오른쪽 손목이 좋지 않다. 고질병이다. 낮에는 타자를 치고 밤에는 핸드폰을 붙잡고 있으니 나을 리 없는 건 당연지사다. 게다가 요 몇 달,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해치우느라 키보드를 온종일 붙잡고 있었더니만 찌릿찌릿한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큰 문제야 있겠나 싶어 병원 가기를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터질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책상을 짚고 일어서다가 손목에 무게가 과하게 실리는 바람에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고야 만 것이다. 가까운 병원을 서둘러 검색했다. 온 직원이 일심동체로 불친절하다는 악평이 가득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병원은 한참이나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리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접수하고 진료를 기다리는데 직원의 말투가 자꾸만 귀에 거슬렸다. 환자가 무언가 물어보려 하면 “진료 보시려면 일단 성함부터 적어 주세요”라며 말을 툭 끊어버리고, 환자가 다시 “아니, 제가…” 하면서 말을 이어나가려고 하면 “일단 이름부터 적어 주시라고요”라며 다그치기를 반복했다. 그 어조가 어찌나 냉랭한지 몸서리가 다 쳐졌다.
게다가 환자가 말귀를 조금이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피식 웃거나, 멀쩡한 이름을 두고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하대를 서슴지 않았다. 병원이야 병만 잘 고치면 그만이니 말투를 문제 삼을 명분은 없었지만, 무례한 말본새에 마음의 상처를 얻을 지경이었다.
누군가 그 직원의 말투를 지적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내가 맡고 싶지는 않았다. 괜한 오지랖을 부려봤자 나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나는 보고도 못 본 척,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적외선 온열 치료기의 뜨끈한 기운이 손목에 닿자 스르르 잠이 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 진동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때마침 편집자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왼손으로 열어본 이메일에는 얼마 전 전송했던 원고에 대한 의견이 담겨 있었다.
표현이 다소 과격하고 독자에게 상처가 되는 내용도 있으니 전반적으로 부드럽게 수정해 달라는 편집자의 요청에 나의 동공이 심히 요동쳤다.
내 문체가 거칠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렇게 쓰인 글을 재미있게 여겨주는 이도, 호쾌하다고 칭찬해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에 걸맞은 문체를 구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졌다.
과격한 어휘와 이별을 고하려 여러 번 애도 써 보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세 살 버릇 여든이 다 돼야 겨우 고친다는데, 그 절반인 마흔밖에 되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적어도 현실에서 그런 말투를 쓰는 건 아니기에 커다란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말 아닌가. 그렇다면 나와 저 직원은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치료 끝나셨고요. 이쪽으로 나오세요. 아뇨! 그쪽 말고 이쪽으로 나오시라고요.” 삿대질에 가까운 손가락질을 하는 직원을 애써 외면하며 병원을 나섰다. 어떻게 하면 거친 언어를 고칠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걷다가 일상에서 마주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웃집 문 너머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강아지의 포효를 들은 배달원이 말했다. “옆집에 맹수가 사나봐요.” ‘개’로 시작하는 험한 말을 두고 ‘맹수’라는 단어를 쓴 그의 정중함이 좋았다.
요가원에 늘 함께 오는 남녀 중 여자가 보이질 않자 한 아주머니가 남자에게 물었다. “짝꿍은 어디 갔어요?” 애인, 여자친구, 부인처럼 관계를 단정짓는 말 대신 ‘짝꿍’이라는 유연한 단어를 쓴 그녀의 사려 깊음도 좋았다. 그들이 대단한 화법을 구사한 건 아니었다. 그저 단어 하나만 달리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래, 단어 하나씩만 바꿔보는 거야.’ 호기롭게 자리에 앉아 원고를 수정하려 했지만 마음과 달리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쪽팔리다’ 대신 ‘창피하다’를 쓰자니 단어가 전하는 강도가 살짝 아쉽고, ‘재수 없어’ 대신 ‘불쾌해’라고 쓰자니 말맛이 살지 않았다.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외국인처럼 국어사전을 검색해 가며 글을 쓰려니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새로운 언어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당 25시간씩 공부해도 1년8개월이 걸린다는데, 그 어려운 일을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입방정 좀 작작 떨 것을. 아냐, 이런 말도 쓰면 안된다고!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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