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백 만드는 공인(工人)들에게 바친 한글 사랑 [내 인생의 오브제]
박은관 회장. 인천 제물포에서 수산업을 하는 거상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쌍끌이 어선으로 연근해 수산을 주름잡았다. 어선의 건조와 수리까지 하는 조선소 오너였고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면 금융과 판매 대행을 하는 객주(客主)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셋째 아들은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갔다. 20대 초반 이탈리아와 미국에 출장을 갔다. 빨간 바지를 입고 거리를 쏘다니는 피렌체 남자들, 300만원 하는 명품 핸드백을 들고 맨해튼 5번가를 누비는 뉴욕 여자들을 보고 패션에 눈을 뜬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 내고 서울 영등포에 시몬느라는 핸드백 회사를 차린다. 1987년, 갓 서른을 넘긴 나이였다.
세계를 누비며 오더를 받아왔고 한 땀 한 땀 정성을 쏟아 핸드백을 만들었다. 코치, 마이클코어스, 마크제이콥스, 토리버치 같은 명품 브랜드들이 그를 찾았다. 박은관 회장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렸다. 자본금 3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가 어느덧 매출 1조원을 바라보게 되던 때, 그의 가슴 한편에 뭔가 허전함이 밀려온다.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그 무엇.
“핸드백 제조공장을 운영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일본말을 쓰게 되는 겁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었지요. 그러다가 베트남 공장에서 베트남 현지 직원까지 자연스럽게 일본말을 쓰는데 그들은 그게 한국 사람에게 배운 거니 한국어인 줄 아는 거죠. 후다(덮개), 우라(안감), 마토메(합봉), 마치(옆판), 구치(입구)…. 이 동네는 도제식 일본어 천지거든요.”
그는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인도네시아든 세계에서 가방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그 표준이 바르고 고운 우리말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대작업에 착수한다. ‘핸드백 용어 사전’ 만들기였다.
2015년 5월 박 회장은 모교인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을 찾는다. 서상규 원장에게 “핸드백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핸드백을 이루는 말들의 아름다움에 많은 사람들이 눈뜨기를 바란다”며 사전 작업을 부탁한다. 인건비를 빼고 4억원을 쾌척했다. 핸드백 용어 사전은 그렇게 해서 2년 3개월 만에 완성된다. 창립 30년 되는 2017년 여름이었다. 핸드백만큼이나 예쁜 610쪽짜리 컬러 책자. 핸드백 제작 전문가, 사전 편찬 전문가, 책 출판 전문가 107명이 동원돼 핸드백 제작 현장에서 나오는 총 1006개의 용어를 정리했다. “내가 지금까지 돈 쓴 것 중 제일 잘한 일”이라고 말하는 박 회장.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캄보디아어까지 총 5개 언어로 번역했다. 이들 나라에 있는 시몬느 공장 근로자들은 이제 한국어로 작업한다. 박 회장이 4년 전 한글날을 맞아 국무총리상을 받은 건 한글 사랑에 대한 소소한 보상이었다.
그는 핸드백 용어 사전에 이어 제2의 한글 사랑을 실천한다. 미국 미네소타주 시골에 한국어 마을 만들기. 한글을 배우려는 어린아이와 학생들이 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 2주 또는 4주간의 일정으로 입소한다. 한옥 건물에서 한식을 먹고 한국 문화와 역사를 배운다. 100% 한국어를 사용하는 몰입형 교육. 프로젝트 이름이 예쁘다. ‘숲속의 호수’.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80호 (2024.10.16~2024.10.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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