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세에 생가에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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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28일, 가람 선생은 78세를 일기로 생가에서 눈을 감았다.
평생의 동지 일석 이희승이 신문에 <가람 형의 영면을 곡함> 이란 추모사를 지었다. 가람>
가람 형은 참으로 낙천가였다.
동지들의 거개가 이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유독 가람 형만은 완강히 이에 불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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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
ⓒ (주)CPN문화재방송국 |
전라북도 문화인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생가 뒤인 용화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평생의 동지 일석 이희승이 신문에 <가람 형의 영면을 곡함>이란 추모사를 지었다.
가람 형은 참으로 낙천가였다. 세사를 달관하여 아무리 당면한 고초와 비애가 클지라도 안색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같은 감방에서 수년을 지낸 일이 있다. 인간 이하의 박대와 흑형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전도에 광명이 가득한 언사로 동지의 고초를 위로해 주곤 하였다.
또 그 해학이 절품(絶品)이었다. 수삼인이 모인 자리에서라도 항상 포복절도할 기담(奇談)과 소화(笑話)로써 좌중에 춘풍을 불러일으켰다.
전기한 사건으로 홍원경찰서 감방에서 수난할 적에 일제말기의 발악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휼계(譎計)와 협박으로써 창씨(創氏)를 강요하였다. 동지들의 거개가 이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유독 가람 형만은 완강히 이에 불응하였다. (주석 1)
정부는 1962년 8월 15일 문화 포장을 수여하고, 전북도는 생가인 수우재를 1973년 6월 23일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가람의 1주기에 지인들이 전주의 다가산에 〈가람시비〉를 세웠다. 고인이 일제강점기에 쓴 <시름>을 새겼다.
시 름
그대로 괴로운 숨 지고 이어가랴 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러기 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
실낱 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 든다.
시인 고두동이 영전에 바친 시이다.
고두동 시인의 '가람님 생각'
유곡(幽谷) 물바위마냥
닦이고 헹군 임의 기품(氣品)
깃들인 그 풍류야
학을 이웃하였거니
선비의 어엿한 정이
이에 어이 더하뇨
한밤에 찾아온 시신(詩神)
잠을 앗아 닭 울리고
은유(隱喩) 직소(直訴) 그 사경(寫景)에
묘를 다한 정성 수법
따른다 뉘가 따르니
어이 이루 말하리
하해(河海)로 남겨 둔 글월
해와 달이 항시 논다
고고(高孤)히 거닌 자취
앞지른 이 뉘 없거니
대인(大仁)은 하늘도 아는가
이리 빛에 젖는구나. (주석 2)
주석
1> <동아일보>, 1968년 12월 1일.
2> <가람문학> 창간호, 1980년 10월.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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