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만 모르는 국가 비상사태 '디지털 성폭력' [소셜 코리아]

김정희원 2024. 10. 1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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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코리아] 주요국, '국가적 위협' 간주 근본 대응...가장 심각한 우리는 구태의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김정희원]

얼마 전 미국에서는 보고서 한 편이 전국적 관심을 받았다. 미국의 아동·청소년들이 디지털 성폭력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였다. 당연히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많은 정치인들도 관심을 보였다. 미국의 상원과 하원에서도 디지털 성폭력이 끊임없이 의제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보고서의 핵심은 단연 '딥페이크'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고등학생의 약 15%가 딥페이크로 만들어진 성적(sexual) 이미지가 학교에서 공유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봤다"고 답했다.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15%의 학생 중 약 79%는 이미지 속 피해자가 학생이라고 답했으며, 약 74%는 가해자도 학생이라고 답했다.

전국학교장협회는 이미 올여름에 학교 현장도 딥페이크로부터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며 정부의 신속한 지원과 예방책 마련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미국은 15%라는 수치에 이렇게 경악하는데 과연 한국은 어떨까. 혹시 고등학생의 15%가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들어본" 것이 아니라 "만들어본" 것은 아닐까? 어쩌면 중학생의 15%가 들어본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초등학생의 15%가 들어본 것은 아닐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다 보니 그만 너무나 암울해졌다.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심각한" 수치는 사실 한국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한국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혐의로 검거된 피의자의 약 84%가 10대였으며, 심지어 이 중 20%는 14살 미만의 촉법소년이었다. 10대 중에서 검거되지 않은 가해자의 수, 딥페이크 영상 속 10대 피해자의 수, 혹은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존재에 관해 "들어본" 학생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전 세계에 존재하는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98%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최근의 조사결과를 고려하면 한국 상황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당연히 한국의 아동·청소년들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더욱 취약한 환경에 놓여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국가는 대체 무엇을 했는가.

성착취물을 '음란물'로 접근하는 대한민국
 2020년 3월 25일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 등 수십 명의 여성을 협박, 촬영을 강요해 만든 음란물을 유포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상황이 이런데도 대한민국 정부는 위기의식이 없다. 영국, 호주, 유럽연합(EU)은 여성을 향한 폭력을 "테러"와 동등한 수준의 심각한 국가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내 성범죄의 심각성을 고려한다면, 성폭력 문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국가는 대한민국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정부는 선제적 대응은커녕 국제 표준도 따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올해 EU 의회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상 폭력 및 가정 폭력 퇴치에 관한 지침'을 통과시켰다. 이 지침은 EU의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최소한의 것"으로, 각 국가는 이보다 더 강력한 법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지침에 맞춰 3년 내에 국내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야말로 최소한, 즉 국가가 기본적으로 따라야 할 책무라는 것이다.

이와 비교해 보면 우리 정부는 그 '기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정부는 디지털 성폭력이라는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적절한 대응 방안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음란물'로 접근하는 대한민국. 딥페이크를 비롯한 성착취물을 '심의'하고 정보통신 서비스 사업자에게 삭제·차단 요청을 하는 주체는 여전히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그런데 방심위가 성착취물의 삭제·차단을 도맡아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한 곳이 방심위인가?

이미 3년 전 법무부 산하 디지털성범죄전문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응급조치' 신설을 권고하면서, 피해자의 신고를 가장 먼저 접하는 경찰에 삭제·차단 권한을 부여해야 성범죄물의 확산을 최대한 일찍 막을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특히 방심위가 성범죄물을 심의하는 것은 그동안 음란물 심의와 성범죄물 심의를 동일시했던 관행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같은 인식은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들이 오랫동안 겪은 문제다. 자신의 신체를 불법촬영한 가해자를 신고해도, 법원이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며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았던가. 바꿔말하면 "성적 흥분을 유발하는 부위"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즉, '음란'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문제의 핵심인가?

디지털 성범죄물을 '음란물' 또는 '포르노'로 접근하면 새롭게 진화하는 성범죄를 결코 막을 수 없다. 이미 국제 표준으로 '비동의 은밀한 이미지'(Non-Consensual Intimate Image, NCII)라는 용어가 정착된 지 오래다. NCII는 동의 없이 제작된 성적·사적 이미지와 영상을 뜻하며, 당연히 딥페이크와 실제 이미지가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 핵심은 해당 영상이 '얼마나 성적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의 인지 또는 동의 없이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특히 회유, 그루밍(grooming), 협박을 통해 생산된 이미지도 포함된다. 이것은 동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용어를 채택한 중대한 계기가 있다. 바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상당수가 아동이라는 점, 그리고 피해 연령이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 결정적인 계기는 아동·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신체 부위를 담은 이미지를 만들도록 유혹하는 신종 범죄의 등장이었다.

디지털 성폭력, 새롭게 규정하고 이해해야
 9월 25일 딥페이크성범죄아웃공동행동이 국회 앞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방지법 개정안 관련 여성가족위원회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 가장 큰 피해 사례는 다름 아닌 한국에 있다. 바로 'N번방 사태'다. 가해자들이 미성년자들과 친해진 후 "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며 스스로 사진을 찍어 보내도록 만들고, 이후에는 각종 협박으로 더 많은 사진을 찍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음란물'이나 '포르노'로 설명할 수는 없기에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다.

이와 같이 한국은 신종 디지털 범죄의 온상이 되었는데, 과연 정부는 범죄의 핵심 속성을 검토하고 재정의하려는 노력을 해왔는지 의문이다. 한국보다 피해 수준이 약한 국가들도 디지털 성폭력을 새롭게 규정하고 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황급하게 법안을 추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보다 진정성 있는 접근과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둘째, '개인의 일탈'로 접근하는 대한민국. 이른바 '텔레그램 딥페이크 사태'가 터지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긴급 현안 보고 자리에서 "기술을 악용하는 것도 인간이고 막는 것도 인간이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마치 "착한 사람은 기술을 착하게 쓰고, 나쁜 사람은 기술을 나쁘게 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구조적 성폭력의 문제를 범죄자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켜 버리는 전형적인 검사의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물론 모든 검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구조적 성차별, 구조적 불평등은 없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이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디지털 기술 역시 그 영향권 아래에 놓여있다. 실제로 디지털 기술의 등장과 발전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신기술이 등장한 직후, 즉 신기술이 민주적 통제를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대상화하는 데 활용되었다는 뜻이다.

예컨대, 지금은 아주 오래된 기술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초창기 커뮤니티인 유즈넷(Usenet)에 게시된 모든 이미지의 84%는 포르노그래피였다. 이제는 딥페이크가 그런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구조의 영향을 받는데 기술만 중립적일 수는 없다. 디지털 기술을 개발하고 활용하는 과정 역시 성차별과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기본 전제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앞서 언급한 EU의 지침이 특히 구조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지침에 따르면 여성을 향한 폭력은 "구조적 차별의 끈질긴 발현"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기인한다. 또한 이는 "한 사회가 남성과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믿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역할, 행동, 속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각 국가는 법안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 젠더 인지 관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따라야 할 최소한의 기본 전제다. 기술이 등장하고 확산되는 과정이 비대칭적인 성별 질서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으로 반대의 힘을 가해야 한다. 개인의 일탈을 처벌한다고 해서 구조적 불평등과 폭력이 사라지거나 디지털 생태계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피해자 관점'이 부재한 대한민국. 며칠 전 우리나라에서도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소지하거나 시청하면 최대 징역 3년에 처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법안조차 그 처리 과정이 순탄하지 못했다. 몇몇 의원들이 "나도 모르게 다운로드해서" 본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다며 "딥페이크인지 알면서" 소지·시청한 경우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딥페이크인지 모르고 성착취물을 봤다면 그것은 괜찮다는 뜻인가? 과연 여기에 피해자 관점은 있을까. 오히려 아주 정확하게 '가해자 관점' 아닐까? 경찰이 힘들게 피의자를 검거했더라도 그가 "딥페이크인지 몰랐다"고 둘러대기만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성착취물을 맘편히 볼 수 있도록 적극 배려해주고 면죄부도 미리 마련해주는 법안을 굳이 새롭게 만들 뻔했다.

피해자가 언론인·인권 활동가일 땐 가중처벌
 9월 4일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서울 학부모회,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경기 학부모회, 서울혁신교육학부모네트워크,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서울지부 등 학부모 및 시민사회단체들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근절 및 근본족 종합대책마련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정민
법안을 논의하고 제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고려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EU의 지침을 살펴보면 지침을 만들기 위해 성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얼마나 주의 깊게 관찰했는지,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을 얼마나 상세하게 조사했는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피고인의 가중처벌 기준도 세워두었는데, 그 기준에는 성범죄 피해자가 누구인지도 포함된다. 예컨대, 피해자가 아동인 경우는 당연히 가중처벌된다. 그런데 지침을 읽어내려가다가 진심으로 감동받은 몇몇 대목이 있다. NCII를 포함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언론인이거나 인권 활동가일 경우에도 피고인이 가중처벌된다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이 보내는 신호는 너무나 선명하다. 여성 기자들과 반성폭력 활동가들을 보호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얼굴과 실명을 드러낸 채로 성폭력을 보도해야 하는 여성 기자들, 여성 혐오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조직해야 하는 반 성폭력 활동가들은 당연히 디지털 성폭력의 타깃이 되기 쉽다. 페미니스트로 낙인이 찍혔다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는 벌써 '기자 합성방'이 등장했고 여성기자협회는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디지털 환경에서 가장 취약한 자리에 놓인 사람들, 공개적인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들을 앞장서서 보호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지침이라니. 이 지침은 신종 범죄가 만들어 낸 새로운 지옥을 제대로 읽어내고 있었다.

피해자 관점에 기반해 진정성을 가지고 현상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마련하는 정책과 가해자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떠올리는 정책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괴리가 있을까. 그리고 그 간극 때문에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하고, 얼마나 더 오랫동안 아픔을 겪게 될까. EU는 앞의 지침을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발표하면서 "여성을 향한 폭력을 종식시키는 첫 번째 대륙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만큼 진심이라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정부는 얼마나 더 많은 여성이, 청소년이, 그리고 아동이 피해자가 되어야 움직이려는 것일까?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만 모르는 국가 비상사태를 겪고 있다.

디지털 성폭력과 딥페이크 문제에 제대로 맞서기 위해서는 기본 전제와 인식부터 고쳐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내용들은 그저 시작점에 불과하다. 더 늦기 전에 관련 부처와 기관들이 전심으로 협력할 것을 간절하게 촉구한다.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소셜 코리아 자문위원)
ⓒ 김정희원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정희원은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소셜 코리아> 자문위원입니다. 권력, 정의, 불평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 이론 및 조직 행동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공정 이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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