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당신의 평안이 다른 누구의 수고에 빚지고 있다면
[김성호 기자]
길고 질었던 독재, 쿠데타, 다시 시작된 독재, 80년 5월의 광주, 민주화운동, 87년 서울의 봄,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역사까지를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가슴 깊이 느낀 적은 없다. 나는 1986년에 태어나 이미 민주화된 나라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내게는 IMF 이후의 실직과 실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뤄지는 기술발전과 경제성장이, 지방과 인구의 소멸 같은 현재적 과업들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부끄럽게도 오늘을 더욱 낫게 한 수십 년 전 누구들의 노고를 마음 다해 바라본 적이 없었다. 내게 그건 정도전의 개혁과 좌절, 이순신의 승리와 죽음, 뭐 그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사하기엔 너무나 멀고 이미 굳어서 역사가 되어버린 것들 말이다. 내가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그에 힘쓴 이들을 대하는 자세는 감사와 존경보다는 여러모로 학습에 가까웠다.
▲ 길, 저쪽 책 표지 |
ⓒ 창비 |
<길, 저쪽>은 오랫동안 믿어왔던, 그러나 좀처럼 실현되지 않던 미덕을 새삼 일깨워줬다. 소설은 오래 전 애인과 헤어지고, 또 다른 애인과도 이별한 채 홀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몇 차례 전시도 했던 제법 이름난 사진가로, 사람이 아닌 풍경들, 생명 없는 물건과 건물 따위를 사진으로 담아낸다.
소설의 끝에서 그의 파인더 안으로 인간이 들어온다. 인간은 물론 그 그림자까지 거부했던 그의 사진세계가 확-하니 열려버린다. '파인더가 눈부신 얼굴을 통해 숨을 쉰다'고 그는 생각했다. '시간이 멈춘다'고 작가는 적었다. 요컨대 <길, 저쪽>은 한 남자의 성장기이며, 사람과 사람이 닿는 연대의 이야기이고, 제목처럼 길 이편에서 길 저쪽으로 나아가는 변화와 변혁의 드라마다. 그로부터 나는 이 세상이 멈추어 있지 않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그 수레바퀴를 제 방향으로 굴리려 온 생애를 바치는 이들이 있었단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공명했단 뜻이다.
1970년대 주인공은 대학생이었다. 그 시절 많은 대학생이 그러했듯 학생운동에 투신한 젊은이였다. 박정희의 오랜 독재가 총탄으로 끝을 맺기까지 그는 벗들과 함께 학교와 거리를 오가며 투쟁했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시도들 사이로 젊은 생명들이 죽고 짓밟혀 이지러지는 과정들이 지나간다. 주인공은 그 과정들을 겪어내며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다. 친구들이 있고 뜻이 있고 온갖 작고 미묘한 감정들이 피어난다. 투쟁이란 거대한 행위 아래는 오늘의 젊은이들과 얼마 다르지 않은 관계와 경험들이 절묘하게 자리한다.
1980년대 졸업 뒤 그는 빈민운동에 투신한다. 여러 가구가 재래식 화장실 하나를 쓰는 빈민가를 찾아가 함께 생활하며 삶을 나아지도록 이끈다. 독재에 저항하고 지역과 노동을 묶어내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한다. 투옥과 고문, 그리고 관계의 상실로 그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기까지 그는 제 모든 것을 바쳐 싸운다.
돌이켜보면 당시 나는 세계와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 그전까지 '나'라는 존재는 '우리'라는 더 크고 견고한 존재의 일부였다. 더 크고 견고한 존재의 바탕은 역사였다.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믿었다. 비록 지금은 '길, 이쪽'에 있지만 언젠가는 '길,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희생의 대열 속에서 그토록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내 의식 속에 '우리'가 사라지고 나만 덩그렇게 있었다. -193, 194p
명멸하는 좁은 문, 그를 건너갈 수 있을까
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한 순간에 깨어진다. 내가 태어난 해인 1986년, 주인공의 삶이 그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 수 없었던 이유로 완전히 박살난다. 희우. 그 삶을 온통 환하게 비추어주었던 여자가 아무런 말없이 훌쩍 떠나갔던 것이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보다도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더욱 커다란 고통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책은 수십 년 만에 희우로부터 온 연락을, 그로부터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삶을, 멈춰있던 바퀴가 다시 굴러가는 모습을 비춘다. 그녀는 왜 그를 떠나야 했을까. 결코 개별적 비극으로 남을 수 없는 희우의 고통과 주인공의 이별에 얽힌 사연이 바닥을 구르는 실타래처럼 술술 풀려나간다.
1986년 희우는 한국을 떠났다. 그녀의 뱃속엔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희우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밤 그를 찾아온 사내들이 있었다. 그들은 희우의 이름을 알았고, 그녀가 주인공과 남다른 관계인 것도 알고 있었다 했다. 그렇게 그들의 차에 올랐고, 어느 지하실에 감금되었다. 옆방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오는 그 차가운 지하실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한 뒤 제가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들까지 모두 다 토해냈다고 했다. 풀려나기 전날 밤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를 차마 어쩌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진실을 알리지 못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다고 했다.
<길, 저쪽>은 떠나버린 희우와 이유를 모른 채 남겨졌던 주인공의 멈춰진 삶이 수십 년 만에 만나 움직이게 되는 이야기다. 다가선 죽음 앞에서 용기를 낸 그들이 제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을 힘껏 껴안고 나아간다. 길, 이편에서 저편으로 나아가는 좁은 문이 그들 사이에서 명멸한다.
<길, 저쪽>은 예술로써 전해지는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사진으로, 희우는 글로써, 또 희우의 뒤에 만난 건축가는 건축으로써 이야기한다. 각자의 작품이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작품으로써 저의 고난과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전한다. 예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넘어 서로를 만나고 이해하게 한다. 마침내 그로써 각자의 예술 또한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서는 순간을 맞이한다.
"모든 예술작품은 상징을 품고 있어. 좋은 예술가는 상징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표현해. 자네 말대로 여기가 죽음의 공간이고 위층이 삶의 공간이라면, 이 집이 품고 있는 상징은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 삶은 죽음을 품고 있으니까. 욕망에 허덕이다보니 죽음을 잊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까 이 집은 삶의 욕망에 갇혀 죽음을 잊고 사는 우리의 슬픈 불구의 삶을 일깨우고 있어." -121p
나의 평안한 삶이 있기까지
필연적인 죽음을 앞에 두고 소설 속 인물들은 제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갖는다. 자신들에게 허락된 시간을 바쳐 삶을 값지게 쓴다. 가까운 이들과 마음을 나누고 작품을 빚는다. 하나하나가 저를 구원하는 일이며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주인공의 오랜 친구는 자기에게 영향을 준 어느 사람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의 보폭은 느리고 한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으니 사람마다 자기 생애에서 무언가에 승리하는 것이 쉽게 허용되지 않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 패배하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는 그분의 말은 저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습니다. -222p
그 말이 오래도록 남아 주인공의 삶을, 또 그 주변 이들의 삶을 이룬다. 작가의 글로써 책에 담겨 읽는 내게 전해진다. 역사의 보폭은 느리고 인간의 삶은 짧지만, 적어도 스스로에게 패배하는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 그런 각오가 싹튼다. 길, 이편에서 저편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결심이 선다. 뷰파인더 안에 인간을 담고, 제 삶을 표현하는 글을 쓰면서 말이다.
1986년 태어난 나의 평안한 삶 가운데, 1986년 수레바퀴 아래 깔려 부러지고 이지러진 많은 이들의 노고가 있음을 실감한다. 역사의 발전과 희생의 가치를 믿는 이들의 수고로움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모두가 정찬의 소설 <길, 저쪽>이 이뤄낸 아름다움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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