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곤의 퍼스펙티브] 체제 이완 징후 있으나 김정은의 통제권 아직은 견고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 있나
북한 체제 이완 징후 넷
북한의 급변사태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직후 처음으로 제기됐다. 북한 체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김일성이 사망했으니 체제 붕괴로 이어질 것이란 내용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김일성 사망 이후 3일, 3개월, 3년 등 구체적인 붕괴 시점까지 거론했다. 북한의 대내외 상황 변화에 따라 네 차례 북한의 붕괴론은 반복됐지만, 북한은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까지 3대가 세습하는 동안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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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문화 유입, 엘리트 이탈 증가
‘두 국가’ 선언으로 지도이념 혼란
사경제 확산으로 국가 통제 균열
감시망 철저 가동, 주민 불만 눌러
」
그럼에도 최근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배경은 여럿이다. 우선, 북한 내부의 심각한 사상이완 현상 징후다. 북한은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년 12월), 청년교양보장법(2021년 9월), 평양문화어보호법(2023년 1월) 등 한국의 문화나 언어를 경계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는 역으로 북한 내부에 한국 문화가 심각하게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면 처벌한다는 조항, 한국 드라마를 보면 최소 5년에서 15년 노동교화형에 처한다는 내용이 이를 보여준다. 나아가 관련 법 제정은 김정은의 지시가 과연 일반 주민들에게 제대로 먹히고 있는지 의문을 낳는다. 북한은 자신들을 법치국가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국가들이 헌법을 최상위법으로 여기는 것과 달리 북한은 헌법 위에 노동당 규약이, 그리고 그 위에 수령의 교시가 자리한다. 김정은의 말 한마디가 법보다 훨씬 강제성이 크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법을 제정해 북한 주민들의 통제에 나선 것은 수령의 지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을 인정한 것이다.
둘째 북한 엘리트층의 이탈이 증가한 것도 체제 이완의 증거라 하겠다. 지난 8월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이 단독 보호 대상으로 분류한 북한 엘리트층 탈북민 숫자가 김정일 시기인 1997년부터 2011년 12월까지 54명이었지만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134명으로 크게 늘었다. 전체 탈북자 가운데 엘리트층이 차지하는 비율도 김정일 시대 때 0.23%에서 김정은 시대에는 1.22%로 5.3배로 늘어났다. 2020년 코로나19로 북한이 국경을 걸어 잠그면서 그 이전부터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던 외교관 등이 탈북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이런 엘리트층의 이탈은 북한 체제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다. 이들이 탈북한 배경이야 다양하겠지만 바깥세상에서 북한을 들여다보니 북한의 주장과 달리 정권이나 체제의 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대대적으로 선전해온 평등사회라는 주장과 달리 핵심-동요-적대계층으로 나뉜 카스트 제도였다는 사실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일 수도 있다.
2개 국가론이 가져오는 내부 혼란
셋째, 북한의 지도 체제 이념의 혼란도 한몫하고 있다. 특히 지난 연말 김정은이 공포한 ‘민족통일 포기 선언’은 주민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건국 후 김일성이 직접 국가의 2대 역사적 사명으로 ‘사회주의 건설’과 ‘조국 통일’을 내세웠다. 북한은 6·25 전쟁의 명분 역시 국토완정론에 근거한 통일 수단에서 찾고 있다. 나아가 1972년 남북한의 최초의 합의인 7·4 남북 공동성명이나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서 언급된 ‘우리민족끼리’ 등 통일 담론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며 북한 정권이 내세웠던 지상 최대의 ‘과업’이었다.
그런데 이런 핵심 담론을 김정은이 이를 대체할 비전을 제시하지 않은 채 지워버리라고 하니, ‘유훈 통치’에 익숙한 북한 주민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지난 7일부터 이틀 동안 최고인민회의 14기 11차 회의(정기국회 격)를 열고 헌법을 수정했지만, 김정은이 지시한 영토조항이나 통일 관련 언급을 수정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이 수정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김정은이 지난 1월 헌법 수정 지시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정권 차원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혼란을 겪고 있는데 주민들은 오죽하겠냐는 가정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장마당으로 대변되는 사(私)경제의 확산이다. 지난 2월 통일부는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보고서 『북한 경제·사회 실태 인식보고서』를 발간했다. 이에 따르면 김정은 체제(2016∼2020년 기준)에서 국영 경제(23.5%)보다 사경제 종사자(37%)의 비율이, 공식소득(23.8%)보다는 사경제 활동을 통한 비공식 소득(69.4%)이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경제와 비공식 소득의 비중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라는 사실도 담고 있다. 인간이 물질 조건에 따라 움직인다는 마르크스의 주장과 달리 북한은 주체사상에서 인간이 의식 변화를 통해 물질적 이해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경제의 확산은 북한 주민들이 물질에 더 민감해지고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주체사상과 괴리를 낳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동시에 사경제 확산을 통한 시장화는 개인주의 성향을 강화해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국가통제에 한계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북한 붕괴론, 신중한 진단을
김정은 시기에 유독 확산하고 있는 이상의 네 가지 체제 이완 현상은 분명 북한 정권에는 도전 요인이다. 그러나 최근 나타나고 있는 일련의 변화가 실제 김정은 체제의 몰락이나 국가가 소멸하는 붕괴로 이어질지에 대해선 매우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정권이 아직은 이런 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의 장치를 가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 체제의 붕괴는 크게 세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해 볼 수 있다. 옛 소련처럼 소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 지도부의 결심, 또는 1825년 12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농노제의 폐지와 입헌 정치의 실현을 요구하며 러시아의 청년 장교들이 무장봉기한 ‘옆으로부터의 혁명’, 마지막으로 북한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해 정권을 전복시키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다. 현재로선 김 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가 체제 전환을 결심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북한의 정권에 절대 충성하며 권력과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핵심계층은 어쩌면 북한 지도부와 운명공동체적 성격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또 북한의 촘촘한 감시망 때문에 ‘옆으로부터의 혁명’이나 주민들의 봉기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이 어떤 형태로든 사소한 반감만 가져도 가차 없는 심각한 처벌을 내린다. 최근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동원된 노동자가 늦게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사라졌다는 탈북자의 증언은 북한 체제의 살벌함을 보여준다. 극단적 위험을 감수하고 체제에 반기를 들더라도 대규모 주민의 참여로 이어질 수 없도록 주민들의 소통을 막는 이중·삼중의 감시망을 가동 중이다.
그렇다고 김정은 체제가 영원히 지속할 것이라며 손을 놓고 있는 것도 문제다. 김정은 정권은 주민들의 사경제 확산을 통한 개인주의화, 특히 장마당 세대의 외부 사조에 대한 관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 저하 현상을 극도로 경계할 것이다. 내부 자원의 고갈과 이념의 혼란에 따른 주민들의 일탈과 체제를 유지하려는 정권 차원의 통제 강화는 숨바꼭질처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당장 주민의식의 변화가 봉기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일탈과 통제의 반복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불만의 표출도 불붙을지 모를 일이다. 이전과 달리 ‘손전화’로 불리는 휴대전화의 확산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은밀한 소통과 불만의 확산 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북한은 핵을 만능의 보검이라며 한국과 미국을 적으로 상정하고 주민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의 세계에 머물던 엘리트층이 느꼈던 ‘현실’이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지고, 진정한 인민 생활 향상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가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김정은 체제의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역사의 경험이자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느낀 ‘현실’일 것이다. 북한 체제의 붕괴론 또는 내구성 등 근시안적이고 편향적인 진단과 대비가 아닌 장기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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