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컷 cut] 적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존중
3000여 년 전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움직이는 기본 감정은 분노다. 영웅 아킬레스는 분노하고, 또 분노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끝에 가서는 슬픔과 화해로 이어진다.
일리아스를 소재로 한 영화 ‘트로이’의 하이라이트는 아킬레스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장면 이후다. 아킬레스는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트로이 성벽 앞을 돈다. 늦은 밤, 그의 막사에 누군가가 들어선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호소한다. “합당한 장례는 치러야 하지 않겠나? 돌려주게.”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스가 고개를 젓자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다. “자네 부친을 알아. 아들이 죽는 걸 안 봤으니 복이 많은 분이지.” 같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드러냄으로써 아킬레스의 닫힌 마음을 연 것이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소. 내일이면 우린 또 적이오.” 아킬레스의 마지막 저항에 프리아모스는 결정타를 날린다. “적(敵)에게도 존중은 해줄 수 있지 않나?” 아킬레스는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가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야차 같던 그에게 다시 인간의 영혼이 깃든 것이다.
서로 적이 되어 싸우는 자에게 너그러울 순 없을 것이다. 원칙에 맞지 않는데 ‘사정이 안됐다’고 봐줄 수도 없다. 다만, 적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닌지 고민할 필요는 있다. ‘사람을 죽일 순 있어도 모욕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던가.
대립 관계에선 존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요즘이다. 어찌나 마음들이 강퍅한지 바늘 하나 꽂을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겠다. 창과 칼로 죽고 죽이던 청동기 시대에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었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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