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틀외교 잇자”…대통령·이시바 첫 정상회담
윤석열 대통령이 10일 라오스 비엔티안에서 열린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이시바 총리 취임 9일 만으로, 두 정상은 첫 만남에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에 공감대를 이루고 북한의 핵 위협과 불법적인 북·러 군사 협력을 규탄했다.
윤 대통령은 회담 모두발언에서 “전임 기시다 총리에 이어 이시바 총리와 셔틀외교를 포함한 활발하고 긴밀한 소통을 통해 한·일 관계 발전을 함께 도모해 나갔으면 한다”며 “특히 2025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양국 관계의 희망찬 미래상을 제시하고 양국 국민이 관계의 도약을 체감할 수 있도록 긴밀하게 협력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3월 일본을 방문한 이후 한·일 관계는 큰 긍정적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며 “이러한 변화는 양국 지도자 간의 흔들림 없는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시바 총리는 “윤 대통령과 기시다 전 총리가 크게 개선시킨 양국 관계를 계승해 발전해 나가고자 한다”며 “셔틀외교도 활용하면서 긴밀히 공조해 나갔으면 한다”고 답했다. 이시바 총리는 “일본과 한국의 긴밀한 공조는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며 “현재 양호한 양국 관계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선 양국 국민의 교류와 상호 이해가 중요하다.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일본 정부 차원에서도 그러한 한·일 관계를 조성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한·일, 수소·양자 첨단기술 협력…북 미사일정보 공유 강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회담 뒤 브리핑에서 한·일 두 정상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 불법 사이버 활동에 대한 우려를 공유했다”며 “북·러 군사협력이 불법적이고 전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위협이라는 점에 공감을 표했다”고 말했다. 김 차장은 이 같은 북한 위협에 대응해 “한·미·일이 가동 중인 미사일 경보 정보 실시간 공유 체계를 면밀히 가동시켜 나가기로 했다”며 “아세안 회의 계기에 북한과 북한을 지원하는 세력에 엄중한 경고 메시지가 발신되도록 양국이 협력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김 차장은 또한 “이시바 총리가 윤 대통령의 8·15 통일 독트린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북한과 안보 문제뿐 아니라 경제협력 방안도 논의했다. 상대국 공항에서 사전심사를 하는 입국 간소화 논의를 가속화하기로 하고, 수소·암모니아와 양자(퀀텀) 분야에 걸친 첨단 기술 협력과 공동 연구도 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김 차장은 전했다. 다만 이번 회담에서 과거사 논의는 없었다고 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오늘 첫 만남이었기에 양국의 역사나 과거사 문제는 전혀 논의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날 회담은 윤 대통령이 이시바 총리와 지난 2일 취임 축하 통화를 한 지 8일 만이기도 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상대국에 친화적인 정상이란 점에서 소통이 원활할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박창건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전화 통화 이후 빠른 정상회담까지 출발 분위기가 좋다”며 “두 정상이 애주가로서 사람을 소중히 하는 등 인간적으로 닮은 부분도 있어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와 견줄 만큼 ‘케미(호흡)’가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선 “‘정책통’으로 유명한 이시바 총리는 정확한 사실에 기반한 논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며 “한국 측이 과거사 문제나 한·일 간 현안에서 일본의 적극적인 자세가 왜 필요한지를 정교하게 잘 논리적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두 정상이 안보 협력 문제에서 상당 부분 이해가 일치할 것으로 내다봤다. 윤 대통령은 물론 이시바 총리 역시 꾸준히 한·미·일 안보 협력을 강조하며 대북 강경 기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전 총리가 지난해 8월 ‘캠프 데이비드 정신’을 통해 틀을 세운 한·미·일 안보 협력이 더욱 속도를 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권태환 한국국방외교협회장(예비역 육군 준장)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역내 안정을 위해선 캠프 데이비드 정신에서 한발 더 나아간 협력의 구체화가 중요하다”며 “북핵 등 한·일 양국이 느끼는 위협의 실체가 비슷하기 때문에 양국 정상이 실질적인 협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에 발표한 ‘8·15 통일 독트린’ 역시 한·미·일 안보 협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풀이도 나온다. 권 회장은 “3국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처음으로 언급한 게 바로 캠프 데이비드 정신”이라며 “일본 입장에서 보면 ‘8·15 통일 독트린’ 역시 지향점이 같은 것”이라고 짚었다. 이날 한·일 국방부 장관들은 화상 회담을 통해 이런 양국 간 안보 협력 의지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엔 한·아세안 정상회의를 주재하고 “한국과 아세안은 협력을 한층 도약시키기 위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를 수립한다”며 “최고 단계의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한국과 아세안은 새로운 미래의 역사를 함께 써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과 아세안은 2010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한 이후 14년 만에 관계를 격상하게 됐다.
윤 대통령은 3년 연속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하며 북한과 오랜 친선 관계를 맺어온 아세안 국가들에 공을 들여 왔다. 윤 대통령은 회의 모두발언에선 “한국은 아세안과 공동 번영의 파트너로서 전방위적이고 포괄적인 협력을 추진해 나가겠다”며 “교육과 투자 중심의 협력을 인공지능(AI), 스마트시티와 같은 미래 분야로 확장하고, 국방 협력을 발전시켜 아세안 사이버 안보 역량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아세안 국가들에 8·15 통일 독트린 지지를 요청하며 “북한의 핵 위협이 존재하는 한 한국과 아세안의 진정한 평화는 달성할 수 없다”며 “북한 도발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합된 의지와 행동만이 역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채택된 ‘한·아세안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에는 비핵과 평화, 번영의 한반도 및 8·15 독트린에 대한 아세안의 지지와 함께 남중국해 내 항행과 상공의 자유 증진의 중요성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
윤 대통령은 이어 아세안+3(한·일·중) 정상회의에 참석해 북한 도발을 규탄하고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린 한·일·중 정상회의를 계기로 3국 협력을 재가동하는 ‘아세안+3 협력’ 도약의 원년을 선포했다. 지난 5월 서울에서 만났던 중국 리창 총리와도 재회했다. 다만 향후 시진핑 국가주석과의 만남을 고려해 별도의 한·중 회담을 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은 아세안 정상회의 주최국인 라오스를 비롯해 베트남·캐나다·태국 정상과도 양자회담을 갖고 무역 투자 및 청정에너지, 방산 협력 등을 논의하며 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윤 대통령은 11일 아세안+3에 더해 호주와 뉴질랜드, 인도 등 동아시아 국가가 함께하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한 뒤 귀국길에 오른다.
비엔티안=박태인 기자, 김상진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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