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일자리 전쟁 직면한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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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웬만한 선전포고에 놀라지 않는다.
일자리를 앗아가는 '전쟁'이다.
일자리 약탈은 생계 수단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전쟁과 비슷하다.
일자리 전쟁에서 밀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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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웬만한 선전포고에 놀라지 않는다. 북한이 종종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을 하니까. 그런데 얼마 전 아주 새로운 종류의 선전포고가 있었다. 일자리를 앗아가는 ‘전쟁’이다.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유세에서 “다른 나라의 일자리를 빼앗고” “그들의 공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온쇼어링(onshoring·기업 생산 시설의 자국 이전) 압박이다. 한국은 트럼프가 지목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일자리 약탈은 생계 수단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전쟁과 비슷하다.
그의 공약이 과격하게 들리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도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리스는 온쇼어링과 일자리 창출에 힘썼던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지난해 초 한국 대기업이 미국에 수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을 때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즉각 환영 성명을 냈다. “○○○주 노동자 가족과 미국 경제에 대형 호재”라고.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덕분이라고도 자찬했다.
당시 이 회사 관계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미국 대통령이 성명까지 내다니 신기하고 뿌듯하다”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옛날에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쳐서 정벌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남의 나라를 멸함에는 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친해져서 끌어당기게 한다.” 중국 근대 사상가 량치차오(1873~1929)의 글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새로운 법’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량치차오는 중국이 열강의 침략을 받던 시대를 산 인물이다.
미국이 한국을 망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해 확정된 미국의 반도체법(CHIPS)과 2022년 발효된 IRA가 대표적이다. 우리 입장에서 이 법을 요약하자면 한국은 미국이 주는 혜택을 누리는 대신 미국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반도체를 공급하고 현대차가 전기차를 팔려면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 손해 볼 게 없다.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큰 시장까지 지키는 전략이다. 실제 한국은 지난해 미국의 최대 투자국이 됐다.
그러나 한국 입장에선 국내 투자가 감소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유출되는 상황이다. 일자리 전쟁에서 밀리는 것이다. 대기업 제조 공장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그만큼 내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까지 수출 중심이었던 부산은 일자리가 줄고 청년 인구가 급감해 ‘노인과 바다’로 불리고 있다. 산업 수도를 자처하는 울산도 예전 같지 않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청년의 첫 직장 중 전일제 비중은 올해 76%로 2016년 대비 9.5% 포인트 급락했다. 대기업 생산직은 ‘킹산직’으로 불리고 신입 공채 경쟁률은 수백 대 1이다. 모두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 수출 기업과 국내 일자리를 위협하는 건 미국만이 아니다. 보호무역주의가 강해지고 미국·중국·유럽연합(EU) G3 경제 블록화가 가속하면서 한국은 과거와 확연히 다른 경제안보 전쟁에 내몰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책 공간 최적화 차원에서 경제안보 거버넌스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정부 내 통합적인 ‘경제안보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미 미국은 2021년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을 장관급으로 격상, 산업·안보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일본은 2022년 경제안보성을 신설하고 경제안보법을 시행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대외 정보 수집과 로비를 강화하고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IRA가 만들어질 때 한국 기업의 이익이 최대한 보장되면서도 국내에서 고용이 계속 창출되는 방향으로 전략을 마련할 수 있다.
강주화 산업2부장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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