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흑백요리사 보고 그리워지는 김수환 추기경

2024. 10. 1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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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연세대 교수·산업공학과)

몰상식·불공정 난무하는 시대
맛으로만 승부해 신드롬 불러

극히 주관적 경험 객관화하고
소통 통해 납득할 결론 도출해

혼란스러운 사회 중심 잡아줄
존경받는 시대의 어른 그리워

지난 3주간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수많은 화제를 낳았던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는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최고의 셰프 ‘백수저’와 재야의 고수 ‘흑수저’가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선입견을 배제하고 오직 맛으로만 승부하는 장면은 SNS에서 수없이 패러디되며 흑백요리사 열풍을 견인하기도 했다. 흑백요리사 열풍은 몰상식과 불공정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공정성’에 대한 목마름이 만들어낸 신드롬일지도 모른다. 또한 계층 간 사다리를 놓아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계층 간 대립 구도를 건강한 경쟁 구도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가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은 결과일 수도 있다.

흑수저 권 셰프의 우승과 지난 10년 동안 주방과 집만 오가며 생활했다는 그의 우승 소감은 열정과 실력만으로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고된 삶을 이어가는 수많은 흑수저들에게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한편, 경연에서 패한 백수저들은 한결같이 경연을 통해 자신의 요리를 돌아보며 또다른 성장을 위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경연 과정에서 백수저들이 보여준 요리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과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통해 백수저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백수저인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백수저들을 이기고자 하는 흑수저들의 패기와 경연을 통해 얻을 것이 없어 보임에도 기꺼이 경연에 참여해 최선을 다하는 백수저들의 용기에 요리를 통해 역경을 극복한 경연 참여자들의 인생 스토리가 양념처럼 더해지면서 프로그램은 흥미를 더했다. 하지만 경연 참여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심사위원들의 실력과 신념이 없었다면 흑백요리사의 흥행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고 수많은 창업을 통해 대중의 입맛과 소통해온 백종원 대표와 국내에서 유일한 미쉐린 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안성재 셰프의 평가는 자칫 공정성에 대한 시비가 일 수 있는 경연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아줬다.

맛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평가 기준을 최대한 객관화하고 평가 기준을 모든 경연 참여자의 요리에 일관성 있게 적용하고자 했다. 때로는 서로 다른 평가 결과를 두고 두 심사위원들은 격론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상대의 평가를 존중하면서 소통을 통해 경연 참여자와 시청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냉혹한 평가로 탈락한 경연 참여자들에게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과 함께 따뜻한 위로와 격려도 잊지 않았다. 요리에 쓰인 식자재와 조리 방법, 심지어 경연자들이 의도하는 요리의 콘셉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장면에서는 시청자들의 탄성을 자아내며 프로그램의 흥미를 더하기도 했다.

두 명의 심사위원들이 심사 과정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냉철함과 책임감 그리고 포용력을 보면서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겪어야 했던 격동의 시기에 통찰력과 포용력으로 사회의 중심을 잡아주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층, 세대, 이념, 성별, 지역 간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 시대,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법원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에 구성원 모두가 귀 기울일 수 있는 시대의 어른,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 줄 수 있는 시대의 어른이 그립기 때문은 아닐까.

평소에는 작은 무리를 지어 평화롭게 풀을 뜯다가 무리가 커지면 풀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먼저 차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앞으로 내달리다가 절벽을 만나면 그대로 떨어져 버린다는 ‘스프링 벅’이란 산양처럼 우리는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극으로 치닫는 경쟁 속에서 공멸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멸을 향해 내달리는 우리에게 울림 있는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시대의 어른이 그립다.

올해 초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실시한 어른에 대한 인식 조사의 결과를 살펴보면 혼란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어른이 부재하다는 데 전 세대가 인식을 같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존경받는 어른의 부재는 개인주의의 심화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 결여라는 부작용으로 이어져 사회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모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주변에서나마 존경받는 어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

박희준(연세대 교수·산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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