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 논설위원이 간다] 1100억 투입 2년 만에 철거 예고…세금 낭비는 누구 책임?

주정완 2024. 10. 1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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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3층 공중보행로 가보니


주정완 논설위원
지난 7일 오후 서울 종로 3가와 퇴계로 3가 사이에 위치한 세운상가 3층 공중보행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들어선 건물 일곱 동(棟)을 연결하는 길이다. 원래 세운상가 건물은 여덟 동이었지만 종로에서 가장 가까운 현대상가는 2009년 철거한 뒤 광장으로 조성했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점심시간 직후여서 그런지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근처 사무실로 향하는 직장인들이 많이 보였다. 일회용 컵에 음료를 들고 다니며 가을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나 카트를 이용해 짐을 나르는 상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 박원순 때 도시재생 내세워 추진
오세훈 “전임 시장 대못질” 불만

보행로 주변 카페·식당 등 활성화
주민 공청회서 철거 반대 주장도

서울시 “1층은 보행자 불편 심해”
내년 상반기 철거 공사 개시 예정

서울시가 1109억 원을 들여 세운상가 건물 양쪽에 설치한 공중보행로의 모습. 내년에 삼풍상가~PJ호텔 구간(250m)부터 철거 계획이다.

상가 건물 좌우 양쪽에 설치한 공중보행로는 올해로 전 구간 개통 2년을 맞았다. 전체 1㎞ 구간 중 2017년 9월 1단계 420m(세운상가~청계상가~대림상가), 2022년 7월 2단계 580m(삼풍상가~PJ호텔~신성상가~진양상가)가 개통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재임 시절에 도시재생 활성화를 내세워 추진했던 사업이다. 서울시는 1단계(480억원)와 2단계(629억원) 공사를 합쳐 1109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10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전임 시장이) 속된 표현으로 대못질을 해놓고 나갔다”며 불만을 터트리기도 했다.

싼 임대료에 소자본 창업 활기
청계천과 을지로 사이에 위치한 청계상가~대림상가 구간에는 개성 있는 디자인의 카페와 식당 10여 곳이 눈에 띄었다. 청계천이나 을지로를 지나는 시민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식사를 하는데 편리한 위치다. 낡고 빛바랜 간판을 내건 전기·전자용품 가게 사이에서 새롭게 단장한 카페·식당이 자리를 잡으며 독특한 풍경을 이뤘다.

점포 종류는 다양했다. 일본식 라면, 중국식 쇠고기 국수, 동남아식 덮밥 가게 등에선 시민들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독립 책방이나 수제 가방점, 패션 신발점 등 특색 있는 가게도 영업 중이었다. 임대료가 비교적 저렴하면서 시내 중심이란 입지 여건이 소자본 창업자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 보였다.

을지로를 향한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는 시민들이 여유롭게 앉아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고 있었다. 2년 전 이곳에서 카페를 열었다는 조재근씨는 “역사가 오래된 상가라는 ‘레트로 감성’에 신세대가 좋아하는 ‘힙한 분위기’가 어우러지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일 낮에는 오피스 상권의 성격이 강하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 저녁 늦게까지 머물다 간다”고 덧붙였다.

길을 걷다 보니 새와 꽃을 주제로 미술 전시회를 연 작은 갤러리도 보였다. 20~30대 청년 작가 두 사람이 공동으로 기획한 행사라고 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동자동휘 작가는 “공중보행로가 생긴 뒤로 젊은 사람도 많아지고 상가가 활성화되는 게 느껴진다. 주변을 지나가다가 ‘이런 곳도 있었네’ 하면서 갤러리를 찾아온 관객도 적지 않다”고 소개했다.

“보행로 ‘허리’ 잘리면 통행 더 줄어”

세운상가 3층 공중보행로를 한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뉴시스]

서울시는 이르면 내년 상반기에 공중보행로 일부 구간을 철거하기 위해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다. 을지로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삼풍상가~PJ호텔 구간(250m)이 철거 대상이다. 다른 구간과 달리 이곳은 상가 건물과 구조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보행로만 설치돼 있다. 인접한 점포가 없으니 통행량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현재는 세운상가의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걸어서 연결하는 통로로 활용 중이다.

조재근씨가 영업하는 카페는 철거 대상인 삼풍상가 구간에서 곧바로 이어져 있다. 그는 철거 공사가 시작되면 카페 고객을 포함한 시민들의 통행량이 줄어들 것으로 걱정했다. 조씨는 “시민들이 잘 다니는 길을 겨우 2년 만에 왜 없애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보행자도 불편하겠지만 주변 상가 활성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3일 서울시가 주최한 공청회에서도 일부 상인과 주민들은 불만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이날 공청회에 참석한 A씨는 “어차피 삼풍상가와 PJ호텔은 철거할 예정이다. 건물 철거할 때 공중보행로도 같이 철거하면 될 텐데 굳이 공중보행로를 먼저 철거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을지로에 사는 주민이라고 소개한 B씨는 “1000억원 이상이 들어간 결과물인데 이걸 잘 보존하고 활성화하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시설 관리가 전혀 안 돼서 물이 새고 비둘기 배설물이 묻어 있는 것”이라며 서울시의 관리 부실을 지적했다.

상가 아파트 주민이라는 C씨는 “세금 낭비는 누가 책임지는 거냐. 나는 열심히 일해서 세금을 내는데 서울시는 그 세금을 너무 쉽게 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참석자인 D씨는 “그 많은 돈을 들여 공중보행로를 연결했는데 왜 250m 구간만 먼저 철거해야 하나. 그렇게 ‘허리’를 단절시키면 3층 상가의 영업에 지장이 있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남은 절차는 시의회 의견 청취
서울시는 세운상가 지상 구간을 걸어 다니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공중보행로 일부 구간의 철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공중보행로를 떠받치는 구조물 때문에 지상 구간의 통행로가 좁아졌고 낮에도 햇빛을 가려 어두침침하다고 설명한다. 상가 1층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의 민원 제기도 있었다고 한다.

진명국 서울시 세운활성화계획팀장은 공청회에서 “상가 지상부를 이용하는 하루 1만2000명의 시민이 불편을 겪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지상부 보행 환경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일부 구간의 철거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 8월 감사원에서 주의 처분을 받은 것도 철거의 이유로 내세운다. 감사원에 따르면 서울시는 자체 투자심사위원회에서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사업의 ‘조건부 추진’을 결정했지만 이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 그중에는 2단계 사업에 착수하기 전에 1단계 사업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1단계 사업이 마무리되기 전부터 2단계 사업의 추진을 서둘렀다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서울시가 감사원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22년 10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공중보행로의 통행량은 당초 예상치의 11%에 그쳤다. 구간별로는 신성상가~진양상가 구간이 통행량 최하위였고, 삼풍상가~PJ호텔 구간이 두 번째로 통행량이 적었다.

주민 공청회 이후에는 서울시의회 심의 절차가 남아 있다. 서울시는 조만간 시의회에 공중보행로 일부 구간의 철거 계획을 제출하고 의견을 들을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의회는 오세훈 시장이 소속한 국민의힘이 다수 의석(전체 111석 중 75석)을 차지하고 있다. 시의회가 철거에 동의한다면 서울시는 내년 상반기에 공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 ‘비운의 세운상가’ 58년, 녹지 축 조성은 지지부진

「 세운상가 부지와 주변 도로는 서울 도시계획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직전 일제는 미군 폭격기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집과 건물을 철거하고 ‘소개 공지’라는 빈터로 조성했다. 같은 해 3월 도쿄 대공습 때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된 것을 경험한 일제가 서울에서 시행한 비상조치였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들이 몰려와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한때 ‘종삼’이란 별명의 성매매 집결지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1966년 철거 전까지는 약 2200가구의 판잣집이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1966년 ‘불도저’라는 별명의 김현옥 서울시장과 당시 35세의 김수근 건축가는 서울 중심에 기념비적 건축물을 세우자고 의기투합했다. 김 시장은 ‘세계의 기운을 모은다’는 뜻에서 세운(世運)이란 이름을 붙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114달러였던 시절 남북으로 1㎞를 잇는 세운상가는 경이로운 건물이었다. 하지만 영광의 날은 짧았다. 1970년대 후반 롯데·신세계·미도파백화점을 중심으로 명동 상권이 커지면서 세운상가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1980년대 들어 세운상가는 ‘빨간책’과 ‘워크맨’으로 통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7년 5월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하고 이 자리에 길이 1㎞, 폭 90m의 대규모 녹지 축을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가를 철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가 점포 소유주와 입점 상인, 아파트 입주민 등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문제 때문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 주변을 도심지형 뉴타운(재정비촉진지구)으로 지정하고 주변 구역과의 통합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세운상가 철거에 따른 보상을 주변 재개발 구역에서 책임지되 서울시는 높은 용적률 등으로 혜택을 주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주변 구역의 보상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도심 부동산 개발 여건이 악화하면서 서울시의 녹지 축 조성 계획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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