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강박, 우울도?… 어쩌면 고기능 ADHD [요.맘.때]
16년 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신재호 마음애사랑의원 원장은 학창 시절 유별난 학생이었다. 성적은 좋았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늘 다른 교과목 책을 편 채 홀로 공부했다. 자신의 관심 분야가 아니면 선생님 말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명은 ‘어리바리’ ‘바보’ 이런 식이였다. 행동이 어줍고, 엉뚱한 말을 곧잘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전공의 수련을 시작한 뒤에는 자신에게 ‘강박증’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이 너무 많아서였다. 그래서 강박증약을 복용하기도 했지만,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떠오르는 생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메모지에 적어두면 그 메모지를 잃어버렸다. 그렇게 여기저기 던져둔 메모지만 십여장이 넘었다.
신 원장이 자신의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를 확신한 것은 자녀가 태어난 뒤였다. 말을 끊임없이 하고 부산한 모습이 전형적인 ADHD 증상을 겪은 친동생과 겹쳐 보였다고 한다. 아이는 수시로 물건을 찾으러 다니며 어디에 뒀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시도를 하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지난달 4일 대전의 병원에서 만난 신 원장은 그런 모습이 어지럽혀진 공간에서도 ‘기억의 흔적’을 따라 필요한 물건을 찾아내는 또래의 아이들과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신 원장은 ADHD도 유전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였다. 자신의 증상도 강박이 아닌, ADHD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했다. ADHD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삶의 질이 현저히 개선되는 것을 경험했다. 이를테면 환자들과 상담할 때 ‘시간 조절’이 가능해지고 전보다 더 정리된 생각을 표현을 할 수 있는 식이었다.
신 원장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환자들의 말을 마냥 들어주느라 예약이 밀리기 일쑤였다”며 “약을 복용하면서 그런 증상들이 꽤 호전됐다”고 말했다.
신 원장은 자신을 ADHD 환자 중에서도 ‘고기능 ADHD’로 분류한다. 학업이나 업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이 없지만, ADHD의 특성을 지녀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신 원장은 “저는 ADHD에 대해 ‘넘치는 자극 반응성’이라고 표현한다”며 “환경에 대한 반응성이 높아서 주의가 분산되기 쉽고, 입력된 많은 자극을 조율하기 어렵다보니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인 경향이 큰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중에서도 고기능 ADHD는 기능을 잘 수행하기 위해 그런 자신의 반응성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느라 강박이나 완벽주의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행의 기복이 크고, 실패와 좌절감을 반복적으로 겪으며 정서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기능 ADHD가 무엇인가
“공식적인 병명은 아니다. 다만 일반적인 성인 ADHD와 달리 업무·학업 등 기능적인 부분을 충분히 수행하는 사람도 ADHD를 진단받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통용되는 명칭이다. 외국에서는 ‘High Functioning ADHD’라고 부른다. 주의할 점은 ‘고지능 ADHD’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능이 높은 게 아니라, 직업을 갖거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등 기능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고기능 ADHD는 어떤 특성을 보이나
“일반 ADHD를 진단하는 증상인 부주의, 과잉행동, 충동성과 별개로 기능이 저하됐거나, 삶의 질이 떨어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직장생활을 잘하는 것 같은데 본인은 슬럼프가 계속된다고 느끼는 경우, 혹은 1년을 아슬아슬하게 채우고 이직을 자주 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이런 사람들이 기능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러나 본인의 내면은 무척 괴로운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내면이 괴롭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대부분의 고기능 ADHD 환자는 정서 문제로 고통받는다. 과잉행동, 충동성이 있다 보니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면서 정서적으로 ‘번아웃’이 된다. 자극 추구 성향이나 강박도 심하다. 부주의함 때문에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거나 시간 약속을 지키는 게 어려운데, 성장하면서 경험적인 학습을 통해 그런 경향을 고치려고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에너지 소모가 너무 심하다. 지적받지 않으려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고, 그러다 보니 정서적으로 지치고, 집에 돌아오면 자신의 생활은 전혀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지내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안 하고 다 내팽개치기도 한다. 그런 실패와 좌절이 반복되며 우울감이 온다.”
‘삶의 질이 저하된 상태’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치료가 필요한 이유다. 치료제를 복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특성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에 대해 납득할 수 있게 되면 혼란이 줄어든다.”
환자들이 혼란스러워 하나
“환자 중에 전문직을 가진 이들도 여럿 있다. 이들은 주변에서 ‘네가 무슨 ADHD냐. 그냥 좀 게으른 거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본인이 느끼기에는 분명 치료가 필요한데, 주변에서는 아니라고 하니 힘들어하는 거다.”
ADHD를 성격 유형 중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시작’과 ‘끝’이 있는 병이 아니라서 그렇다. 생애 전반에 걸쳐 이어지는 일종의 ‘성향’인 것이다. ADHD 성향이 있어도 경미하다면 굳이 치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떤 기준치를 넘어서서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면 치료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반드시 약물치료를 받아야 하나
“자신을 조절하는 능력 등 이미 기능이 떨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인지행동치료로 바로 효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같은 패턴으로 습관이나 행동을 조절하려 했다가 오히려 또다시 실패를 경험하고 자존감이 더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약물치료가 필요한데, 약물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기능이 좋아진 후에 인지행동치료를 병행할 수는 있다.”
약물 부작용은 없나
“기본적으로 두근거림, 식욕저하, 수면장애 등이 있다. 그러나 전문가의 지도에 따라 용법을 정확히 지키면 불편함 없이 복용할 수 있다. 단 선천적인 심장 문제가 있거나 간질 발작이 있거나 중독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는 처방이 극히 제한된다. 임신 상태일 때도 통상적으로는 복용하지 않는 것을 권고한다.”
예후는 좋은 편인가
“경과나 특성이 매우 다양한 질환이라 예후가 어떻다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성향이다 보니 치료 기간은 보편적으로 긴 편이다.”
약을 계속 먹어야 하는 건가
“예를 들어 우울증약은 일정 기간 꾸준히 복용하면 지속적으로 고르게 효과를 나타낸다. 약을 일정 기간 먹지 않아도 효과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ADHD약의 특성은 진통제에 가깝다. 복용 후 증상이 완화되다가 작용 기간이 끝나면 효과가 사라진다. 다음 날 안 먹으면 효과가 없다. 다만 약을 복용하는 동안 생활이 안정되고 자신만의 건강한 습관이 형성되면 복용을 중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후 이직 혹은 육아 등 환경에 변화가 생기면 다시 약을 복용하고, 또 안정되면 재차 중단하기도 한다.”
ADHD도 유전의 영향을 받나
“유전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다. 엄마는 ADHD 성향이 매우 강하고, 자녀는 비교적 약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황장애, 조현병 등 유전력이 높은 정신질환들 가운데서도 ADHD가 가장 높은 순위에 위치한다. 흔히 자녀의 신장이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ADHD도 키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성인 ADHD의 경우 여성 환자가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갑자기 성인이 돼서 ADHD가 생기는 게 아니라 어릴 때 진단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ADHD 환자 자체는 남녀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아동청소년기에는 증상이 보다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남자아이들의 진단율이 여자아이들보다 높다. 여자아이들은 그런 경향이 드러나지 않은 채 성장하다가 성인이 돼서 병원을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울해요’ ‘혼란스러워요’ ‘대인관계에 계속 문제가 생겨요’ 등 다른 문제를 호소하며 오는 여성분들 중 꽤 많은 비율로 ADHD를 진단받는다.”
최근 몇 년간 SNS 등에 ADHD 관련 콘텐츠가 많아졌다
“좋은 현상으로 본다. ADHD의 성인 유병률은 5%, 아이들은 7~9%에 이른다. 여러 질환 가운데 굉장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치료를 받는 분들은 이와 비교해 현저히 적다. 관심을 제고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온라인상의 테스트로 자신이 ADHD라고 확신하기보다 전문기관의 진단을 받는 게 좋다. 또 내게 ADHD 경향이 있다는 의심이 들 때 나의 지속적인 특징인지,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과 맞물려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럼 어떤 특성이 있을 때 의심해야 하나
“첫 번째로 일관되지 않을 때 의심해 봐야 한다. 자신을 되돌아볼 때 상황에 따라 수행력과 의욕, 태도의 차이가 커서 혼란스럽다면 의심해 봐야 한다. 두 번째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일에 지장이 생기거나 괴로움을 느낄 정도라면 전문기관에서 평가를 받을 것을 권한다.”
ADHD의 긍정적인 면은 없을까
“새로운 것을 개척하거나 도전하기 위해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ADHD 기질이 있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은 고생에 따른 이득을 계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거나 기발한 발견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창업가 가운데 ADHD 성향이 있는 사람의 비율이 상당히 높게 나타났다. 조절이 안 되고 혼란스러운 날 것의 상태이지만, 잘 정제하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전=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스위스 ‘조력사망 캡슐’ 사용 중단…이유는
- “마케팅 비용은 본사가”… 변우석 내세운 이디야 ‘화제’
- “환자 사망했는데 잠만 잔 의사”…선배들 저격한 박단
- ‘어른’ 되기 힘드네요… “미국인, 서른에야 어른 됐다 느껴”
- 군사문제연구원장 “여성들 군대 가면 출산율 오를 것”
- 경찰 “문다혜, 파출소 조사… 귀가 동행자는 공개 불가”
- “흑인 신부는 아버지 없나”… 하인즈 광고 인종차별 논란
- 곽튜브도 피식대학도… 추락한 조회수 ‘알고리즘’만의 문제?
- “상견례 식사 꼭 해야 하나요” 예비부부의 고민 [사연뉴스]
- 피해자 실명·나이 그대로…‘박대성 사건 보고서’ 유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