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욱 칼럼]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고승욱 2024. 10. 9.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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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재판 지연 무려 5100만건
기소된 지 28년 만에 무죄 석방
살인범 선고에 42년 걸리기도

재판 신속성 순위 높은 한국
의원 늑장 선고에 심각성 부각
법원, 권력 의식하는 것 아닌가

비르발 바갓은 2022년 4월 22일 인도 비하르주 고팔간지 교도소에서 석방됐다. 30세인 1994년 1월 27일 살인죄로 구속된 지 28년 만이다. 그런데 죗값을 치른 만기 출소가 아니었다. 미결수로 살다가 무죄가 선고돼 석방된 것이다. 바갓은 숨진 채 발견된 남성과 여행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증거라고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공소장 제출이 미뤄져 재판은 시작도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은 잊혀졌고, 인권 변호사들이 찾아낼 때까지 미결수 바갓은 교도소에서 28년을 보냈다.

바갓이 출소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은 인도 전역을 흔들었다. 중년 남성의 달관한 듯 무표정한 얼굴은 더 큰 충격이었다. 흔히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고 말한다. 인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재판 지연은 일상이다. 전국적으로 지연된 재판이 5100만건이다. 2022년 4700만건이었는데 2년 만에 400만건이 더 늘었다. 30년 넘게 지연된 재판도 18만건이다. 밀린 사건을 모두 처리하기까지 324년이 걸린다고 한다.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난해 6월 우타르프라데시주에서 90세인 강가 다얄에게 종신형이 선고됐다. 그는 1981년 12월 30일 불가촉천민 집단을 습격해 어린아이를 포함한 10명을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단죄까지는 42년이 걸렸다.

공범 9명은 이미 사망해 처벌할 수 없었다. ‘인종 범죄’만큼 심각하게 여기는 ‘카스트 범죄’였다. 범행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인디라 간디 총리까지 나서 정의의 실현을 약속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데 이유가 더 황당했다. 이 마을을 관할하는 법원이 바뀌면서 사건 기록이 이관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판 지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골칫거리다. 성경에는 모세가 장인 이드로로부터 ‘항상 백성을 재판하라’는 조언을 받는 장면(출 18:22)이 나온다. 1215년 영국의 존왕이 서명한 마그나 카르타에는 ‘정의를 지연시키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이 담겼다. 귀족들은 재판권을 가진 왕이 시간을 끌며 죄인을 처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최근 시작된 독일의 재판지연 보상제, 프랑스의 특임법관 및 준비절차담당법관제, 일본의 계획심리제 등은 재판 지연을 막는 제도적 장치들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2022년 1심 합의부 기준 평균 처리기간은 형사사건 223.7일, 민사사건 420.1일이다. 2013년에는 각각 151.8일, 245.3일이었는데 10년 만에 60%나 길어졌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은 증가하는데 법관 증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게 근본 원인이다. 여기에 고등부장 승진제 폐지, 법원장 후보추천제 실시, 사법행정권의 소극적 행사 등이 겹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면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이다. 세계사법정의프로젝트(WJP)가 집계한 재판 신속성 순위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는 세계 142개국 중 형사재판 4위, 민사재판 10위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거의 매년 5위 안에 들었다.

최근 재판 지연 이슈가 급격히 떠올랐지만 극복하지 못할 수준은 아닌 것이다. 법원 내부에서 이미 신속한 재판을 위한 많은 연구가 이뤄졌고, 대책도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평가도 많다.

그런데도 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재판 지연은 현실보다 훨씬 심각하다. 이유를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뉴스의 중심인 국회의원 피의자들의 재판이 마냥 늦어지는 탓이 크다. 형사 피의자의 1심 처리기간이 평균 200여일인데 유독 의원들은 예외다.

황운하 조국혁신당 의원은 기소부터 1심 선고까지 1401일 걸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 선고기일이 다음달 15일이니 처리기간은 799일이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데 재판이 지연되고 있는 의원이 20명이 넘는다. 유무죄를 따지는 게 아니다. 정치보복과 탄압일 수도 있다. 그걸 가리는 곳이 법정인데, 마냥 시간을 끌며 판단을 미룬다.

국민들은 법관마저 극단적인 진영 논리에 영향을 받는다고 의심한다. 그게 아니라면 권력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고승욱 수석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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