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법의 지배

이경원 2024. 10. 9.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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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철학을 가르치던 막스 셸러에게 한 학생이 물었다.

공개된 발언 전문에는 '법의 지배'가 영어로 병기됐고, 신임검사들을 향한 당부였건만 왜인지 정치권이 뒤집어졌다.

당시 총장의 뜻을 아는 검찰 고위 간부들은 "법의 지배를 말씀하신 것은 곧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는 말씀"이라고 말했다.

사법을 이용한 정치, 선출된 권력의 지배 따위의 말들이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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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원 정치부 차장


도덕철학을 가르치던 막스 셸러에게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내세우는 윤리 기준에 맞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셸러가 답했다. “방향을 지시하는 도로표지판이 표지하는 곳으로 가고 있는가?”

후학들은 이 답변을 놓고 “윤리학이 곧 실천까지 말하진 못한다”거나 “개인 신념과 양심이 도덕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때도 있다”는 등의 주석을 단다. 깊은 뜻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군색한 답변이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매사 언행일치가 자신 있었다면 선문답할 이유는 무언가 싶은 것이다.

제자 앞에서 아무래도 성인(聖人)이 되진 못한 20세기 대표 철학자의 일화를 읽으며 언젠가 신임검사들 앞에 서 있던 대통령이 떠올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이던 2020년 8월 신임검사 임관식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Rule of law)’를 통해 실현된다”고 강조했다.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란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라고도 말했다. 공개된 발언 전문에는 ‘법의 지배’가 영어로 병기됐고, 신임검사들을 향한 당부였건만 왜인지 정치권이 뒤집어졌다. 당시 총장의 뜻을 아는 검찰 고위 간부들은 “법의 지배를 말씀하신 것은 곧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는 말씀”이라고 말했다. 방편으로서의 법이나 법 기술 따위가 아니라 헌법과 정의로서의 법치를 신임검사들에게 강조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사법을 이용한 정치, 선출된 권력의 지배 따위의 말들이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놓였다.

게으른 기자조차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시는 조국과 울산 수사의 이듬해, 법무부 장관이 총장의 채널A 사건 수사지휘권을 배제하고 국회가 검찰 수사권 조정을 언급하던 시절이었다. 검찰을 흔드는 많은 일이 나름의 규범을 갖춘 ‘민주적 통제’로 소개됐으나 법조계에서는 “과연 무엇이 법치냐”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여론은 형식보다 내용, 조문보다는 덕성, ‘해도 되는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묵직하고 거침없이 말한 사람 편이었다. “총장이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화가 났다면 제 발 저린 격”이라고 말해준 법조계 원로도 있다.

지금 ‘법의 지배’는 가리켰던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이제 높은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는 “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것이 있다. “해도 되는 일 아니냐” 따진다면 나름의 질서들을 간단히 부정할 순 없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위원 두 명으로 의결하는 것에 법적 문제는 없었다. 독립기념관장의 인선도, 대통령실 출신들이 이런저런 기업의 감사와 고문이 돼 일하는 것도 법과 절차에 따라 가능했다. 대통령 부인이 총선을 두고 누군가와 연락을 나눴더라도 ‘컷오프’였으므로 공천개입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가 고가의 선물을 받았더라도 처벌할 법 조항이 없으므로 애초 무혐의가 명백했다.

이것들을 “해야 하는 일이냐” 묻는다면 긍정할 수 없다. 법이란 애초 사회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있다. 덕의 배경이 희미해지는 그 경계선에서 “해도 되는 일 아니냐” 항변하는 장면을 보면 깊은 뜻들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군색한 답변이란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표지한 방향으로 걷지 못한 채 인간적 현실을 끌어안고 서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룰 오브 로’나 ‘룰 바이 로’ 같은 멋진 말을 알아들어서 박수를 보냈던 것이 아니다. 영부인을 처벌할 법이 없었듯 그가 사과해야 할 법도 없을 것이다. 다만 법을 넘어선 고뇌가 늘 사회의 품격을 만들어 왔다.

이경원 정치부 차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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