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이 책이 의로운 이의 안식처가 되기를
산화한 파일럿… 아늑한 방
서가에 책 한권으로 남기를
지난여름 나는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몇몇 도시를 방문했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은 정도로 무더운 날들이었다. 신록은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풀벌레들이 마구 울었다. 기차 창문 너머로 맑은 하늘이 보일 때면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이 책을 과연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걸까.
책을 만드는 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 그렇게 믿으려 노력한다. 지금까지 견뎌 온 노동의 시간이 나를 지탱하고 있으니까. 지나친 호기심과 불안감은 나를 언제나 기묘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좀 버거운 책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일이 잦았다. 옛 문장이 그득한 수천장 분량의 학술서를 만든 적도 있고, 수만장의 사진 중 몇백개를 골라 나름의 서사를 갖춘 책으로 엮어낸 적도 있다. 잡지와 단행본, 전자책, 도록 등의 여러 책을 만들면서 나는 생의 상당 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이것은 의로운 이를 위한 책이었다. 2022년 1월 11일, 공군 제10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 KF-5E가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태봉산에 추락했다. 노후 항공기의 엔진에 화재 경고등이 켜졌고, 조종 계통의 결함이 추가 발생했다. 기체는 마구 흔들리며 급강하하기 시작했고, 창문 밖에 펼쳐진 민가와 교회의 풍경을 본 젊은 조종사는 탈출을 포기했다. 그는 조종간을 붙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의 마지막 십여초를 견뎠다. 최종 추락 지점은 민가에서 100여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고, 그가 탈출했더라면 전투기가 민가에 ‘거의 확실하게’ 떨어졌을 것이라고 공군 사고조사단은 밝혔다.
고인의 이름은 심정민, 고작 스물아홉 살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한 이를 우리는 ‘영웅’이나 ‘위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영웅이나 위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젊은 조종사의 앳된 얼굴에 어느새 부드러운 주름이 내리고,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베테랑이 돼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전투기를 향해 달려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휴일에는 가족들과 밥을 먹고 노래방에 가고, 친구들과 축구를 하거나 여행을 가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안락의자에 앉아 젊은 시절의 무용담을 끝없이 늘어놓는 수다스러운 노인이 됐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양심과 긍지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고인은 우리 생활인들의 시간에서 역사라는 공간으로 그 자리를 옮겨 앉는 중이다. 하지만 그가 우리로부터 영원히 떠나가는 것은 아니며, 사람이 반드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영원에 속한 어떤 이들은 싱그러운 웃음을 지은 채로 우리에게 온갖 값지고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준다. 그런 이들의 단단한 마음은 올곧은 심지가 되어 이 세계가 함부로 부패하거나 녹아내리지 않도록 지탱한다.
그러나 잔혹하게도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의인을 요구한다. 2000년부터 2023년에 ‘조기 퇴역’하기 전까지 노후 전투기인 F-5의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는 고인을 포함해 모두 열네명이나 된다. 하늘뿐 아니라 바다와 땅에서도 끊임없이 의로운 죽음이 일어난다. 우리 필멸자들이 지닌 기억과 애도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고인은 언젠가 다른 의인들에게 슬픔의 자리를 양보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 이 책이 고인과 가족, 친구들의 기억이 머무를 수 있는 작은 공간이 돼주면 좋겠다. 의로운 죽음을 둘러싸고 자신의 주장을 높이는 이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아늑한 방의 작은 서가에 차분하게 꽂힌 책 한 권이 된다면 가장 좋겠다. 고통과 슬픔이 조금은 잦아든 어느 고요한 밤, 고인을 잊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누군가가 책을 펼쳐 들고 웃다가 조금은 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천천히 글을 다듬고 사진을 바꿔 넣으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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