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계 뒤집은 혁신가 "당위·협박 안 통해, 돈이 사람 움직인다" [안혜리의 인생]

안혜리 2024. 10. 9.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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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 인터뷰


지난 8월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을 만났다. 광주 시립발레단장을 끝으로 단체장은 내려놨지만, 그가 지금껏 해온 잡음없는 개혁 이야기가 이 시국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현동 기자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8월, 정말 오랜만에 최태지(65) 전 국립발레단장을 만났다. 철밥통 문화 탓에 복지부동하는 공무원·공무직(무기계약직)이 점점 많아져 공직사회가 골머리를 앓는다거나, 고령의 저성과자들에게 일 시킬 방도가 없어 대기업들이 골치를 썩인다는 류의 뉴스가 나올 때마다 이상하게 조직·인사 전문가도 아닌 최 전 단장이 늘 가장 먼저 떠올랐다.

최태지. 존재감 없던 한국 발레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예술가이자 지도자. 하지만 지난 2021년 광주 시립발레단장을 끝으로 지금은 아무 공식 직함이 없다. 그런 그가 계속 생각나 결국 그를 불러낸 건, 최 전 단장이 단순히 발레를 발전시킨 발레계 전설이 아니라 몸담았던 곳마다 별다른 잡음도 없이 혁신과 개혁을 이뤄낸 뛰어난 행정가라서다.

국립발레단 프리마 발레리나 시절 '호두까기인형'을 공연 중인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 [중앙포토]

학연·지연은커녕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교포 2세로 고작 30대 나이에 파격적으로 국립발레단장에 올랐으니 텃세에 일찌감치 무너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두 번에 걸쳐 12년 동안 국립발레단장을 맡아 비약적 성장을 이뤄냈다. 지난 2017년 광주 시립발레단장으로 갔을 때도 호남 태생 아닌 타지에서 온 그를 두고 다들 "아무리 서울에서 지명도가 있어도 배타적 정서가 강한 이 동네에서 1년도 못 버틸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최태지가 누군가. 예술가라는 정체성보다 연금만 바라보는 공무원 조직처럼 늙어가던 단체를 다시 본연의 '젊은 예술' 하는 발레단으로 돌려놓았다. 임기를 넘치게 채운 것은 물론이다.

「 말 서툰 재일 교포 무용수 출신
학연·지연 없지만 간 곳마다 성과
내치지 않고 돈과 자존심 지켜줘
믿음 주고 기다리니 따라오더라

정치뿐 아니라 스포츠계 내분, 의·정 대립 등 온 사회가 극단적 갈등으로 대립하는 지금 여러 단체를 거치며 조용한 개혁을 척척 일궈온 그에게 들을 얘기가 많을 거 같았다. 역시 기대했던 그대로였다. 지난 8월 7일 4시간 동안 들은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개혁은 말 아닌 돈


발레리나 은퇴(1993) 후 국립발레단에서 지도위원 하던 지난 1996년 서른일곱 나이에 갑작스레 국립발레단장이 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무용원 초대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전임 김혜식(82, 당시 54세) 원장보다 무려 열일곱 살 젊어진 파격 인사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프리마(주역) 발레리나 출신 최연소 단장이라는 타이틀은 하늘로 솟구칠 가벼운 날개가 아닌 자꾸 바닥으로 꺼지는 무거운 짐이었다.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주위의 삐딱한 시선 속에 뭐라도 빨리 새로운 걸 보여줘야 했다.

지난 1998년 국립발레단 '해적' 무대에 오른 김지영(왼쪽)과 김주원. 러시아 유학파인 이들이 역량에 맞는 공정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발레단은 호봉제를 없애고 공연 수당도 정비했다. [중앙포토]

그렇게 내놓은 게 소극장 무대 '해설이 있는 발레'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 '찾아가는 발레'였다. 특히 '해설이 있는 발레'는 시작하자마자 평균 객석 점유율 219%(454석 극장에 996명이 몰려 입장 못 한 관객은 로비에서 모니터로 관람)라는 엄청난 흥행을 거두면서 발레 대중화와 스타 발굴 무대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마침 각각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학교와 볼쇼이발레학교를 막 마치고 온 당시 스무 살 안팎의 김지영·김주원이 입단해 엄청난 관객몰이를 하자, "국립발레단이 스타 마케팅만 몰두한다"는 시기 섞인 뒷말도 나왔다. 하지만 정반대다. 스타가 아니라 나머지 70여 명 단원 챙기려 한 시도였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돈 때문이었다.

발레는 나이 먹어 경험 쌓인다고 더 좋아지지 않는다. 평생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당시 국립극장 산하단체다 보니 공무원식 연공서열 호봉제에다 주역이든 군무든 실력이나 공연시간과 상관없이 똑같은 값싼 공연 수당을 책정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1년에 세 작품 올리는데 공연 수당은 무대에 내내 서는 프리마나 잠깐 등장하는 군무 할 것 없이 7만원에 불과하니 대부분 제사(공연)보다 젯밥(개인 레슨)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일부 단원은 진단서 떼면서까지 어떻게든 무대에 안 서려고 했다. "개인 레슨 하지 말라"고 해봐야 들을 리 없었다.

인센티브가 필요했다. 그게 '해설이 있는 발레'고 '찾아가는 발레'였다. 연 150회 공연하며 개인 레슨보다 더 많은 돈을 손에 쥐여주니 다들 자발적으로 공연에 집중했다.

이때 확실히 깨달았다. '프로페셔널리즘은 곧 돈'이라는 간단한 명제 말이다. "열심히 하라"는 당위나 "이러면 자른다"는 식의 강요·협박이 아니라 일한 만큼 성과만큼 보상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직업적 전문성이 자리 잡을 수 있고, 이 토대 위에 개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개혁은 마음 얻기


돈의 위력은 2000년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으로 독립하면서 더 뼈저리게 실감했다. 처음엔 독립이 뭔지 몰랐다. 알고 보니 직접 벌어 먹고살라는 얘기였다. 가만 앉아 얻어지는 건 단돈 1원도 없었다. 작품 하나 무대에 올리려 해도 돈, 전부 돈인데, 돈이 없었다. 예산을 쥔 기획재정부 청사 복도에 죽치다 만난 말단 공무원이든 협찬 준다는 기업 관계자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돈만 따올 수 있다면 국립발레단장이라는 자존심은 내려놓고 그 앞에서 90도로 몸을 숙였다.
볼쇼이 예술감독을 30년 넘게 한 러시아의 전설 유리 그리고로비치(왼쪽)와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이 단원 오디션 보는 모습. 재단법인 독립 후 외국 안무가 초청 등 다양한 시도로 발레단을 한층 더 혁신했다. [중앙포토]
그때 모두들 국립발레단의 위기라고 했고 나 역시 겁이 났지만 발상을 바꾸니 기회로 다가왔다. 돈만 있으면 누구 눈치 볼 거 없이 내 결정대로 뭐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30년 넘게 볼쇼이 예술감독을 한 '살아있는 전설' 유리 그리가로비치(97)를 안무가로 초청해 '스파르타쿠스' 등 대작을 하나둘 소화했다. 그 결과 발레단 전체의 클래식 발레 역량뿐 아니라 개별 무용수들 수준까지 획기적으로 높아졌고, 이는 유료 관객 증가와 무용수 해외 진출이라는 성과로 돌아왔다.

시스템 정비도 이어갔다. 2001년엔 최종학력과 연공서열 우선인 호봉제를 없애고 해외 유수 발레단이 하듯 기여도와 예술적 역량 평가에 따라 연봉을 책정했다. 과거엔 김지영·김주원처럼 기량이 월등히 좋은 젊은 유학파들이 발레학교 학력 인정을 못 받아 한국서 대학·대학원 나온 고령의 단원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연봉을 받았다. 이걸 바로잡으니, 젊고 실력 있는 발레리나들이 "정당한 보상 받으며 무대에 설 기회가 있다"며 앞다퉈 지원했다. 또 2009년엔 역할·기량·시간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던 공연 수당을 5만~40만원 차등 지급했다. 노력한 만큼 가져가는 판을 깔아주니 내가 굳이 뭐라 하지 않아도 단원들끼리 건강한 경쟁을 했고,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됐다. 근시안적으로 문제를 덮어두는 게 아니라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쓴 건 단원들 마음이었다. 난 돈을 위해 자존심을 내려놨지만, 단원들은 돈 때문에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지켜줘야 했다. 예술가는 자존심이 전부이기도 하고,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상처받아 반감이 생기면 아무도 안 따른다는 걸 알아서다. 가령 연봉제를 도입할 땐 최소한 호봉제 시절보다 연봉이 더 적어지지 않도록 했다. 새로 들어온 후배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선배를 타박하지도 않았다. 대신 무대 기회를 더 줘서 스스로 자기 기량을 깨닫게 했다.


개혁은 기다림


이런 경험은 광주 시립발레단장 할 때 큰 도움이 됐다. 국립발레단에선 한해 100억원 넘게 썼는데 처음 오니 4억원(인건비 불포함)이 전부였다. 공연 수준을 높이기는커녕 공연 자체를 올릴 엄두가 안 났다.
돈보다도 사람이 더 문제였다. 철밥통 호봉제인 데다 일반 사무직과 똑같이 정년 60세 보장받는 공무원 신분이라 근속 20년 채워 연금 받으려고 버티는 40~50대 단원 비중이 꽤 컸다.
두 번째로 국립발레단장 맡은 2013년. 돌아와보니 노조가 생겨있었지만, 갈등은 없었다. [중앙포토]
발레는 젊은 예술, 보여지는 예술이다. 굳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나이 들수록 체력적으로나 테크닉적으로 기량이 점점 떨어지는 걸 스스로 안다. 무대에 설 체형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도 본인이 가장 잘 안다. 국립발레단은 연봉제를 도입해 경쟁 체제를 만들고 은퇴 단원 제도를 둬서 기업 임금피크처럼 2년 동안 나갈 준비를 시켜 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국내 최고 단체라는 자부심이 커 단원 대부분 자존심을 못 지킬 만큼 버티진 않았다.
지난 2018년 광주 시립발레단장 시절 유리 그리가로비치와 '백조의 호수'를 올렸다. 러시아에서 온 스태프들과 공연 뒤풀이하는 모습. [사진 최태지]
광주 시립발레단은 정반대였다.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는 문화가 팽배했다. 한마디로 열심히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서울에서 힘들게 좋은 선생님 모셔와도 근무(연습) 시간 끝나는 오후 4시면 전부 칼퇴근이었다. 남아서 더 배우고 싶은 단원도 있었겠지만, 선배들이 "왜 남느냐"며 스트레스 주고 노조 눈치 보느라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런 모습에 "관두겠다"고 수차례 사직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일부러 노는 게 아니라 나이 먹어 안 되는 그 안타까운 마음도, 또 마땅한 노후 보장 없는 상황에서 매달 나오는 연금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이번에도 두 가지를 우선 챙겼다. 돈과 자존심 말이다. 다행히 명예퇴직 제도가 도입돼, 나가는 단원에게 일시불로 연금만큼 챙겨줄 수 있었다. 또 어떤 경우에도 단원들 앞에선 '국립발레단'의 '국'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가 국립발레단을 언급하는 순간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최태지 전 단장은 광주 시립발레단 정기공연에 '김창옥과 함께 하는 발레'를 올려 흥행에 성공했다. 인기 강사 김창옥(오른쪽)과 함께 무대 백스테이지에 선 모습. [사진 최태지]

마지막으로,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 몸이 안 되고 기량 떨어진다고 배제부터 하는 대신 오히려 추추(발레복) 입혀 무대에 오르게 했다. 어쩌면 무대에 서는 기쁨보다 민망함이 더 컸을 수 있겠지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준 셈이다. 그렇게 단원 40여 명의 절반 가까이 물갈이됐고, 노조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왕따 단원 생활과 지도위원 경험 없이 곧장 단장을 했으면 성과를 못 냈을 거라는 걸 알기에, 발레 아닌 분야에 조언하긴 조심스럽다. 하지만 진정 믿고 기다려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누군가의 인생을,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다면 그 한 사람이 돼야 하지 않을까.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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