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낭독용 신발
침대에서 읽는 책과 지하철에서 읽는 책은 다르다. 아침에 읽는 책과 한낮에 읽는 책도 다르다. 그 모든 풍경 속에 동일한 한 권이 놓여도, 시간과 장소가 달라지면 책은 우리에게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책을 종이책으로 읽을 때와 전자책으로 읽을 때의 감각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눈으로 읽을 때와 소리 내어 읽을 때도 그렇다.
최근에 존 버거의 『A가 X에게』 오디오북 녹음을 했다. 라디오 디제이로도 책을 낭독할 일이 많지만, 한 권을 나 홀로 낭독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둘은 비슷한 듯 달랐는데 가장 큰 차이는 음악 여부다.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읽을 때는 낭독 사이에 음악이 들어가니까 달리기로 치자면 ‘걷뛰’(걷다가 뛰다가)와 비슷하다. 그에 비하면 오디오북 작업은 풀코스 마라톤이라 해야 할까. 음악이 나가는 시간이 없으니 읽다가 내가 알아서 끊어야 한다. 러너가 컨디션에 따라 급수대를 야무지게 이용하듯이.
공통점도 있다. 어떤 글이든 낭독하면 그 글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는 것. 단거리 주자처럼 한껏 피치를 올리려는 습관이 있는 나 같은 독자라면 분명히 읽는 속도의 회복을 느낄 것이다. 지면의 활자들, 이를테면 괄호나 대시, 주석까지 어떻게 소리로 전달할지 살피면서 천천히 읽는 마음을.
재미난 상상을 해보았다. 침대보다 더 커다란 판형의 책 속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가면서 낭독하는 것이다. 미술관과 비슷하다. 벽에 적힌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은 후에 걸어서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고, 그 사람이 걷는 동안 신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그대로 녹음된다. 페이지를 커튼처럼 열어젖히는 소리가 녹음될 수도 있다. 어떤 페이지를 넘길 때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도 좋겠지. 이쯤 되면 낭독용 신발도 등장하지 않을까. 책과 낭독자의 기분에 따라 다양한 조합이 가능할 것이다. 어떤 책 속으로, 어떤 신발을 신고 들어갈까.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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