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수 (2) 가난한 농가 살림에도 집안 기대 속 삼척중학교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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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나는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쩌다 한 번 먹을 수 있었는데 기름진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으레 배탈이 나거나 알레르기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결국 형님은 일곱 번째 자식으로 아들을 뒀지만 40대 후반이란 젊은 나이에 술로 인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까지 지내셔서 세상 물정을 잘 알고 계셨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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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 아는 아버지, 교육에 열성
논·가축 팔아 학교 근처에 집 마련
1956년 나는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상마읍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주로 밭농사를 하며 먹고 살았다. 생일이나 제삿날, 명절이 아니면 쌀밥을 구경하지도 못했다. 보리 옥수수 감자가 주식이었다. 흉년이 드는 해에는 도토리를 주워 모아 식량으로 보충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어머니가 쌀로 밥을 지으시는 날이 있었는데 그때 잡곡을 씻어 먼저 밥솥에 안친 후 그 위에 쌀을 따로 부었다. 연장자 순서로 밥을 담다 보면 나는 잡곡이 많은 밥을 먹었다. 아버지가 간혹 밥을 남기시면 그 남긴 밥은 막내인 내 차지가 됐다. 그 날은 운 좋은 날이었다.
깊고 깊은 산골에서는 쌀밥뿐 아니라 고기도 흔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먹을 수 있었는데 기름진 음식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으레 배탈이 나거나 알레르기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고기 부작용 탓에 거의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육류는 거의 입에 대지 못했을 정도였다.
큰 형님과 나는 스무 살 차이가 났다. 큰 형님은 거의 술과 더불어 살았다. 어느 매서운 겨울날 술에 취해 도끼를 들고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맨발로 급히 옆집으로 피신한 적도 있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난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다. 그때 형님이 그런 행동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장남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슬하에 딸만 여럿을 뒀던 큰 형님은 당시 국내 정서대로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고 아들이 없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형님은 일곱 번째 자식으로 아들을 뒀지만 40대 후반이란 젊은 나이에 술로 인해 돌아가셨다. 둘째 형님은 군 복무 중 자살했다고 기록됐다. 의문사 중 하나다. 자살할 이유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고 야학을 통해 한글을 익힌 정도였다.
그래서 부모님은 막내인 나에게 많은 기대를 거셨다. 내가 다닌 마읍초등학교는 총학생 수 200여명, 학년별 학생 수 30명 남짓한 작은 학교였다. 졸업생 10명 중 1명만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까지 지내셔서 세상 물정을 잘 알고 계셨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키기로 했다.
당시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반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 삼척중학교에 지원했다. 나는 붙을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삼척중학교에 지원하기를 원했다. 떨어질지 모른다는 내 걱정과는 달리 입학 성적 상위 30% 안에 들면서 나는 여섯 반 중 두 번째 특수 반에 들어갔다.
내가 삼척중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우리 집 재산인 논과 소를 팔아서 삼척에 방 세 개짜리 집을 사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삼척에서 친구와 사촌 등 4명을 보살피도록 했다. 내 중학교 생활을 위해 뜻하지 않게 두 분께서 따로 생활하시게 된 것이다.
삼척으로 이사 온 그해 겨울, 가난해서 배추 살 돈이 없었던 어머니는 동네에서 김장하고 버린 배추를 주워 김치를 담그셨다. 얼어붙은 배춧잎으로 담근 김치는 질겼지만 내게는 그 어떤 김치보다 맛있었다. 거기에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헌신과 자식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나는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정리=김동규 기자 kky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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