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소녀의 죽음
끔찍한 범행이 있던 자리에 누군가 깐초와 하리보 젤리를 가져다 놓았다. “하나뿐이었던 내 친구. 정말 아팠을 텐데 너무 미안해.” 친구의 글도 나붙었다. 평범한 귀갓길, 전남 순천의 18세 A양이 생면부지 30살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 약을 사러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아빠, 약국에 약이 없대.” A양이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아버지는 밤길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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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는 남성에 피살된 순천 10대
단순 묻지마 아닌 여성 겨냥 범죄
젠더 폭력 근절은 실태 파악부터
」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고 해도 대로변이었다. 피의자 박대성은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소주를 네 병 마시고 주방에서 흉기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가게 앞에 멈춰선 택시 기사와 몇 마디를 나눈 후 A양을 발견하고 약 10분간 따라갔다. A양이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며 “뒤에 남자가 있는데 무섭다”고 했던 것도 알려졌다. 결국 친구는 휴대폰 넘어 A양의 비명을 들어야 했다.
박대성은 범행 후에도 2시간여 흉기를 소지한 채 거리를 배회했고, 한 남성과 가벼운 시비를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주변 CCTV에는 범행 후 그가 씩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범행 20분 전에는 “동생이 자살할 것 같다”는 박대성 형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식당에 출동했다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서 무차별적으로 벌어진 끔찍한 범행이라 사건은 순천발 ‘묻지마 범죄’(이상동기범죄)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흉기를 들고 나온 박대성이 처음 만난 택시 기사는 건너뛰고 A양을 따라가 범행했다는 것은, 공격하기 쉬운 상대를 골라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일반적인 묻지마 범죄와 다르다는 지적이다. 범행 후에도 흉기를 버리지 않고 동네를 배회한 것 역시 손쉬운 추가 공격 대상을 물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보도된 사실로 미루어봤을 때 이 사건에서는 타기팅(피해자 선별) 분명, (돈·원한 등 뚜렷한) 범행동기 없음, 범행 결과 잔혹이라는 혐오범죄의 세 가지 특성이 엿보인다”고 강조했다. 다분히 여성을 겨냥하고 노린 범죄라는 얘기다. 참고로 경찰은 2022년부터 ‘묻지마 범죄’ 대신 ‘이상동기범죄’란 용어를 쓰고 있다. ‘묻지마 범죄’란 말이 ‘묻지마 범죄자=정신질환자 혹은 사이코패스’라는 등식처럼 ‘괴물’ 같은 가해자 개인만 부각한다는 지적에 따라서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지난해 모르는 남성에게 살해 위협을 받은 여성은 88명(범행을 막던 행인 등 포함)이고, 그중 9명이 사망했다. 나흘에 한 명꼴로 살해 위협을 받은 것이다. 연령대는 20대(28%)와 10대(26%)가 많았다. 경찰 집계가 따로 없어 언론 보도를 집계한 결과니, 실제 사상자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모르는 가해자들이 진술한 범행 이유는 ‘성폭력 시도’(23%), ‘여자라서’(13%), ‘홧김에, 싸우다가 우발적으로’(9%) 등이었다. 여성의전화 측은 “일면식 없는 가해자에게 살해(미수 포함)당한 피해자 다수는 여성”이라고 밝혔다.
길거리에서 모르는 이에 의해 여성이 피해를 당하면 ‘묻지마 범죄’냐 ‘여성혐오범죄’냐 양자를 대비시키며 따져 묻는 일이 많지만, 묻지마 범죄 자체에 여성혐오적 성격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논문 ‘묻지마 폭행,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김민정)에 따르면 “국내 묻지마 범죄 사례에서 ‘여자니까’ ‘여자는 맞아도 되니까’ ‘여자가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라는 가해자 진술이 다수 발견되는 반면, ‘남자니까’ ‘남자는 맞아도 되니까’ ‘남자를 기다렸다’는 진술이 목격되는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경찰은 이상동기범죄 대응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지만, 실제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더 많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관련 통계도 내기 시작했으나 젠더 갈등을 자극할 우려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실태 파악이 근절 대책의 출발점이다. 다시 한번 A양의 명복을 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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