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금배추가 보여준 미래
“도저히 안되겠어. 김치 주문해야겠다.” 얼마 전 엄마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김치 구입을 선언했다. 냉장고 속 김치가 거의 떨어져 가는데, 시장에서 한 포기에 2만원짜리 ‘금배추’를 만난 것이 여간 충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요. 요새 파는 김치도 괜찮잖아.”
태연하게 반응했지만 내심 놀라웠다. 워킹맘 시절에도 매번 공들여 김치를 담그던 엄마였다. 집에서 만든 김치가 제일이라던 엄마의 집밥 정신도 생전 처음 보는 금배추를 이기지는 못했다. 엄마는 2만원짜리 배추가 얼마나 작고 시원찮은지를 두고 긴 성토를 하더니 미련 없이 시판 김치를 주문했다. 다음 날 해당 제품은 품절로 바뀌어 있었다.
올해 초 ‘금사과’에 이어 이번엔 ‘금배추’다. 원인에는 역시나 이상기후가 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례적으로 길어지면서 배추 작황이 부진해 김장철을 앞두고 가격이 치솟았다. 저온성 채소인 배추는 18~20도 정도에서 잘 자란다. 잎이 여러 장으로 겹쳐지며 속이 둥글게 차오르는 결구 시기로 접어들수록 고온에 취약해진다. 그런데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인 강원도 태백은 지난 8월에 일 최고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9월이 된 뒤에도 이상고온 현상이 이어져 9월 19일 기준 최고기온이 30.6도까지 치솟았다. 수확기가 다가올수록 더위에 시들고 병드는 배추를 보며 농부들의 마음도 같이 타들어갔을 테다.
정부는 긴급 수입한 중국산 배추 물량에 더해 가을배추가 본격적으로 공급되면 시장 가격이 안정될 거라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비단 사과와 배추만의 문제일까.
기후는 특정 지역 특정 품목에만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다. 장을 볼 때마다 좀 먹고 풀이 죽은 채소, 색이 옅어지고 모양이 불규칙한 과일이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음을 느낀다. 특히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떨이로 나온 제품도 자주 사는데, 올해는 저렴한 가격에 혹해 지갑을 열었다가 후회한 경험이 여러번이다. 소비자로서 합리적인 가격에 질 좋은 농산물을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이유다.
고된 여름 끝에 다가오는 겨울은 또 다른 변수다. 한반도는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커 본래도 농사를 짓기 까다로운 환경이었다. 이제는 기후 위기로 날씨의 변동성이 더욱 커진 상황이다.
기상청이 발간한 ‘2023 이상기후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1~2월에 대설·한파가, 3~4월에 이상저온이, 5~9월에 집중호우와 태풍, 6월과 10월에는 우박이 내리며 농가에 치명적인 자연재해가 연달아 발생했다. 1월에는 제주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서 제주도에서만 4704㏊ 규모의 농작물 피해가 있었다. 무, 양배추, 브로콜리 같은 월동채소의 냉해가 컸다. 뒤이어 찾아온 이상저온 현상은 14개 시·도의 과수 농가를 덮쳤다. 사과 농가 피해 규모만 1만8807㏊였고 배 6427㏊, 복숭아 5332㏊, 자두 3341㏊, 포도 1537㏊ 등으로 조사됐다.
물론 기존 작물을 기후변화에 더 강한 품종으로 개량하고 고온에서 잘 자라는 아열대성 작물을 도입하는 등 대안은 있다. 빨간 사과를 대표하는 홍로 재배지는 기후변화로 점차 북상해 주산지가 강원도로 변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농촌진흥청은 2021년 빨갛게 착색할 필요가 없는 노란 사과 ‘골든볼’ 품종을 개발해 지역 농가 보급을 추진 중이다. 시장 선호도가 높은 망고 재배 면적도 2017년 42㏊에서 지난해 121㏊로 6년 만에 약 3배로 늘었다. 현재는 겨울을 나기 위한 하우스 운영 비용이 높은 편이지만 장기적으로 겨울 기온이 오르면 아열대 작물 재배 비용이 낮아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다만 당장 내년의 여름은 어떤 모습일지, 한국의 연중 기후가 어떻게 바뀔지는 사실상 예측불가다.
지난달 제주에서 만난 아열대 작물 전문가는 “연구의 속도보다 기후변화의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달라진 한반도 기후에 맞는 농작물을 찾아내려면 수많은 신규 농작물을 재배하고 현장에 적용해보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앞에선 그 결과를 얻기 위한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얘기다. 자연이 주는 식량을 한정 없이 얻기 위해 자연을 거슬러온 대가일까. 당연하게 식탁에 오르던 김치 한 조각마저도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 오는 건 아닌지 괜스레 두려워지는 가을이다.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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