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뿜어낸 끈적한 하얀 액체 ‘초대박’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10. 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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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향유고래는 왜 ‘정자고래’라고 불렸을까
일러스트 : 강유나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라(Call me Ishmael).”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 중 하나다. 소설 ‘모비딕’의 서문이다. 명작 중 명작이라고 꼽히는 이 책은 거대한 향유고래와 이를 잡으려는 포경선 선장 에이허브의 투쟁을 그린다. 인간의 복잡다단한 욕망과 충동을 온전히 담았기에 미국 문학의 대명사로 통했다. 최근에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소개로 다시 한번 입소문을 탔다.

향유고래는 그 거대한 크기 탓에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개였다. 푸른 바다에서 분수처럼 뿜어내는 분기의 아우라에 압도된 것. 향유고래가 유명한 것은 비단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름에서부터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향유고래의 영어 이름은 ‘스펌웨일(Sperm Whale)’, 우리말로 직역하면 ‘정자고래’다. 이 거대 고래에 붙은 다소 ‘외설적인 이름’에는 재미난 얘깃거리가 켜켜이 쌓여 있다.

고래 머리에서 쏟아진 하얀 액체

선원들 “대가리까지 정액 들어찬 야한 고래”

인류는 고대부터 포경을 해왔다. 거대한 물고기를 잡았을 때 온 마을이 식량 걱정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족히 열흘은 끼니 걱정을 안 해도 됐을 정도다. 가장 오래된 ‘포경’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6000년 전, 우리나라 반구대암각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경의 중요성은 그 의미를 더해갔다. 19세기 초중반 미국은 포경의 나라였다. 고래잡이가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하면서다. ‘고래기름’은 산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아직 윤활유가 개발되기 이전, 기계에 들어가는 기름은 대부분 자연에서 채취돼야 했다. 그중 고래기름은 양도 많고 품질도 뛰어나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자원이었다. 고래는 기계도 돌리고, 도시의 밤을 밝히는 동력이었다. 내장 안에 덩어리처럼 몰려 있는 용연향(龍涎香)은 몽환적인 향으로 금보다 비싼 물질이기도 했다.

“이거 정액 아닌가.”

1800년대 초 미국의 한 포경선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16m, 45t이 넘는 수놈 고래 사냥에 성공했기 때문. ‘향유고래’였다. 그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보관을 위해 분해를 시작했을 때다. 대가리를 분해하자 하얗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그것도 1900ℓ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선원들은 생각했다.

“외설스러운 놈이 분명하구먼. 대가리에까지 정액이 가득한 걸 보면.”

그때부터다. 선원들이 향유고래를 ‘스펌웨일(정자고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머릿속에서 발견된 ‘정액(?)’은 그야말로 초대박 상품이었다. 일반 고래기름에 비해 점도가 낮고 안전성이 확보된 제품이라 특히 윤활유로 주목받았다. 수많은 포경선이 ‘향유고래’ 사냥에 나서게 된 배경이다. ‘머릿속 정액’은 당시 뱃사람의 보물섬과 같았다.

거대한 향유고래 사냥이 쉬울 리 없다. 그중 ‘끝판왕’은 ‘모카딕’이라고 불리는 알비노 향유고래였다. 칠레 남부 모카섬에서 자주 출몰했던 탓에 모카딕이라고 불린 녀석이다.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 새하얀 이 녀석은 특별한 외모만큼이나 그 포악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만큼 뱃사람의 도전욕을 자극했다. 놈을 잡으면 부와 명성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당시의 ‘원피스’였다고나 할까. 포경선들이 모카딕에 도전한 것만 해도 100여차례. 승리는 항상 모카딕의 몫이었다.

포경선이 전설의 모카딕을 쓰러뜨린 때는 1838년이다. 모카딕은 새끼를 잃고 흥분한 다른 고래를 도우려다 작살을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21m의 육중한 몸뚱이에서는 1만6000ℓ의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포경의 역사에서 전설 같은 서사가 쓰인 셈. 이 기록을 본 미국의 한 작가가 이를 소설로 구현했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다.

정액이 아닌 박치기의 원천

바닷물 들이마시면 냉각돼 무거워져

다시 향유고래 머릿속으로. 당연한 얘기지만, 이 액체는 정액이 아니었다. 후대 과학자들은 이 액체에 ‘경뇌유’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뇌유’는 고래 정액만큼이나 중요한 물질이다. 향유고래의 거대한 무게를 지탱하는 무게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바닷물을 들이마셔 경뇌유가 냉각되면 머리가 무거워지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 자연은 참 위대한 신비로 가득하다.

고체가 된 ‘경뇌유’는 향유고래의 가장 큰 무기가 되기도 한다. 딱딱해진 머리를 활용해 포경선을 잇달아 박살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인기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고래 ‘라분’이 거대한 벽을 머리로 여러 차례 박는 모습은 만화적 상상력만은 아니다. 1820년에는 향유고래의 2번에 걸친 박치기를 받은 범선 에식스가 침몰했다는 기록이 있다. 전장 24m, 238t급의 거대한 배가 나룻배마냥 으스러졌다. 단순히 머릿속 정액으로 치부할 일이 아닌 것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은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소설이다. 1800년대, 거대한 크기로 뱃사람 도전욕을 자극한 향유고래 ‘모카딕’이 모티브가 됐다.
‘모비딕’ 뜻이 거대한 성기?

2m 길이 ‘그곳’ 보유한 향유고래

향유고래를 둘러싼 외설적 껍질을 하나 더 벗겨본다. ‘모비딕’의 이름을 둘러싼 오해다. ‘모비’는 대물이라는 뜻의 속어고, ‘딕’은 아시다시피 남성 성기를 속되게 일컫는 말. 우리말로 하면 ‘왕××’ 정도 된다.

위대한 작가 허먼 멜빌이 소설에 그렇게 속된 제목을 붙인 건 아니다. 모비딕이라는 이름 자체가 19세기 초반 실존한 고래 ‘모카딕’에서 따온 것. 모카는 섬의 이름이고 이 당시에 ‘딕’이라는 말은 성기를 의미하지 않았다. 딕은 오히려 ‘톰’처럼 평범한 남성 이름의 대명사여서, 그 당시에는 딕을 말할 때 아무도 킥킥대지 않았을 테다. 딕이 성기를 뜻하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이 지나서다. 오히려 모비딕의 출간 이후 그 제목을 성기 속어로 사용했다고 보는 게 논리적인 추론이겠다. 모비 역시 집필 당시에는 ‘거물’이라는 뜻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향유고래의 그곳이 2m를 족히 넘는 데다가 무게도 70㎏을 넘는다는 건또 다른 비밀이다. 아마도 지구상 모든 수컷 중 가장 큰 놈일 테다.

스펌웨일은 한때 110만 개체에 달했을 정도로 번성했다. 포경 산업이 확산한 뒤 개체수가 확 줄어들어 멸종 위기에 처했다. 지금은 포경이 금지된 덕분인지 30만 개체 수를 유지하고 있다. 석유가 고래기름을 대체하게 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때로는 과학의 발전이 지구 생명체를 보호하기도 한다. 인류와 오랫동안 싸워오면서도,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개체인 향유고래. 우리가 지구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그들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9호 (2024.10.09~2024.10.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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