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윤석열 정부는 아무 문제 없다
의·정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던 지난 3월 한덕수 총리와 이 주제를 놓고 꽤 오래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대통령실보단 유연할 거라 기대했는데, 오히려 더 강경해서 놀랐다. 또 의료계 목소리에 귀를 닫은 듯한 모습에 '의·정 갈등 악화만 남았다' 싶어 참 답답했다. 그때의 슬픈 예감은 이제 현실이 돼버렸다.
당시 전국 의대 교수들은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학생을 늘리면 감당할 수 없고, 의학 교육 기반만 송두리째 와해시킬 것"이라고 반대했다. 의대를 평가·인증하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도 "대규모 증원은 교육 부실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2025학년도 시작까지 고작 1년 만에 늘어난 학생 수에 맞춘 교수 충원과 시설 확충은 불가능한데, 한해 3000명이던 신입생이 갑자기 5000명으로 는다면 교육이 제대로 안 될 거라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제일 잘 아는 교수들이 한목소리로 "불가능하다"고 호소한다면 정부는 듣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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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전공의 알고 하는 얘긴가"
대화 상대 아닌 개혁 대상 삼아
무대책 현실 외면으론 개혁 안 돼
」
그런데 이날 한 총리는 "그분들(의대 교수)이 알고 하는 얘기냐"고 했다. "얼마의 정원을 감당할 수 있느냐는 판단은 자기 대학 퍼실리티(시설)를 보고 교육을 잘하기 위해 정부와 협력하는 대학 당국이나 총장이 더 잘 알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얘기도 했다. "정부가 교육을 잘하도록 만들겠지만, 만약 교육이 안 된다 해도 부실 교육 받은 학생들은 다 국가고시(국시)에 떨어질 텐데 왜 일부 교수가 지금부터 안 된다고 하느냐. "
병원 떠난 전공의 1만명을 보는 시각도 비슷했다. 일반 국민은 전공의 사직 이유가 오로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반대로만 알지만, 이들은 지난 2월부터 줄곧 정부가 증원과 함께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 더 크게 반발해 전면 백지화를 요구해왔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본인들의 현재와 미래가 달린 중차대한 문제인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정부 정책을 따진 후 나온 요구였다. 그런데 한 총리는 "내 주위에 정부 의료개혁 과제를 읽어본 사람이 별로 없다"며 "보나 마나 우리 인턴·레지던트들도 읽어볼 시간이 없었을 텐데 (맞는 말 하는 정부 얘기 안 듣고) 귀를 딱 막고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의대 교수든 전공의든 뭘 모르고 떠드는 개혁의 대상일 뿐이고 의료문제에 관한 한 "내(정부)가 제일 잘 알아"라는 투였다. 이러니 정부가 입으로는 "대화"를 외쳐도 의료계와 소통이 될 리 없다.
이같은 이 정부 고위 관료들의 왜곡된 자신감과 탁상공론은 교수들 우려대로 부실 교육, 그리고 이를 꼼수로 면피하려는 무리수 정책으로 이어졌다.
정부 뜻대로 의사가 한꺼번에 2000명(1507명으로 조정) 늘기는커녕 휴학 중인 본과 4학년이 올해 국시 응시를 못 하니 매년 배출되던 의사 3000명이 내년엔 나오지 않는다. 3000명 듣던 예과 1학년 수업은 올해 신입생 휴학 여파로 내년엔 7500명이 들어야 한다. 부실 교육이 불 보듯 뻔하다. 다음 달 의평원 심사가 시작되는데, 정원이 늘어난 30개 대학 상당수가 인증 탈락 수준이라는 말까지 들린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 총리가 여러 차례 호언장담한 "교육 질 보장" 대신 폐교 날벼락 맞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또 3년간 교수 1000명 늘리겠다는 국립대에선 거꾸로 교수 줄사퇴가 이어진다.
하나하나 의료체계와 의대 교육, 나아가 입시까지 뒤흔드는 큰 문제다. 그렇다고 물러설 윤석열 정부가 아니다. 필살기를 꺼내면 된다. 안 되면 규정 바꿔 되게 하고, 있는 문제 없다고 우기기 말이다.
의대생 휴학(1학기)과 미등록(2학기) 와중에 대책 없이 "유급 불가" 방침만 고집해온 교육부는 지난달 30일 서울대 의대가 전국 의대 가운데 처음으로 휴학을 승인하자 "대학 본연의 책무를 저버린 매우 부당한 행위, 감사 추진, 엄중 문책"이라는 험한 말을 쏟아내며 서울의대 교수들을 맹비난했다.
갸우뚱했다. 연 30주 채워야 하는 수업을 10월 되도록 안 들은 학생들 휴학해주는 교수가 부당한가, 아니면 교육 질이 떨어지든 말든 11월 중순부터 서너 달 오전·오후반 나눠 수업 시늉만 내면 유급 안 시키겠다는 교육부가 부당한가. 교수 부족하면 동네병원 의사에게 자격 주고(7월 대학교원 자격 기준 개정안 입법예고), 의대 인증이 불안하면 인증기관 갈아치우는 건(9월 고등교육 기관 평가 인증 등에 관한 규정 개정안 입법예고) 또 어떤가. 내 상식으론 퇴행도 이런 퇴행이 없는데, 윤석열 정부는 이걸 의료개혁이라고 부른다.
다시 3월로 돌아와, 그날 한 총리는 2000명 증원을 발표하면 "전공의 전부 나갈 거로 예상했다"고 했다. 정부는 알고 질렀다는 얘긴데, 전공의 사직 5일 만에 복지부에 검사 파견한 거 말고 정부가 어떤 대책을 세웠었는지 궁금하다. 아무리 봐도 "우린 문제 없다"는 정신승리 말고는 없는 거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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