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정의 시선]통일 부정한 김정은·임종석의 '역설적 공로'

장세정 2024. 9. 3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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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논설위원

임종석 전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9일 '9·19 평양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통일하지 말자"면서 북한이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발언해 역풍을 맞고 있다. 탈북민 출신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은 탈북민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3만4000명의 탈북민과 1000만 이산가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소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반갑게 악수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SNS에 '종북(從北)인 줄 알았더니 충북(忠北)인가'라는 글을 올려 임 전 실장의 주장이 북한에 충성하는 것 아니냐고 직격했다. 평소 언행이 신중한 오 시장이 이념적 선명성을 부각해 정통 보수층에 호감을 얻으려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요즘 여의도에서 '이재명 친위대'로 불리는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도 비판 대열에 불쑥 가세했다. "(통일을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면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할지언정 동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느닷없이 '계엄 준비설'과 '이재명 테러설'을 제기해 럭비공 언행으로 구설에 오른 그가 모처럼 상식적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

「 북 ‘두 국가론’에 반통일 맞장구
헌법에 반하고 반민족적이지만
영구분단 위기의식은 일깨워줘

'갑자기 툭 던진 설익은 발상'이라는 김 최고위원의 지적처럼 임 전 실장의 통일 부정은 그냥 즉흥적인 실언일까.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으로 임수경 비밀 방북을 주도했고, 민주화와 통일을 외쳤던 '386세대'의 상징성이 강한 임 전 실장이 역대 최악의 여름 폭염에 더위를 먹어 통일을 부정하고 "통일부도 없애자"고 소리쳤을까. 논란이 커지는 와중에 지난 26일 “(남북은) 누가 시비 걸 수 없는 두 국가”라고 쐐기를 박았으니 일시적 잠꼬대는 아닌 것이 분명해졌다.

1989년 7월 27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시도하던 당시의 임수경 씨와 문규현 신부.[중앙포토]
한양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 시절에 임종석(任鍾晳,1966년생)은 한국외대 불어과 4학년이던 임수경(林琇卿,1968년생)의 비밀 방북을 주도했다. 두 사람을 오누이 관계로 오해하지만, 성씨가 다르고 통일 철학도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수경은 '두 국가론'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0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남북 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로 새롭게 규정한 것이 임 전 실장의 이번 발언을 촉발한 것 같다. 북한 선전 매체가 김 위원장의 주문을 친절하게 안방까지 전달하는 요즘 시대에 옛날 고정간첩처럼 단파방송을 몰래 청취해 비밀 지령을 받을 필요도 없다. 문재인 정권 시절 민주당이 국가정보원의 대공 수사 기능과 역량을 축소시켰고 우리 사회의 안보 의식마저 약화됐다. 급기야 헌법 4조의 통일 조항을 부정하는 공공연한 발언이 나오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 김정은과 임종석의 '반통일론'은 같은 듯 다른 점이 엿보인다. 김 위원장의 통일 지우기는 세습 독재 정권의 생존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벼랑 끝 포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핵무기를 손에 넣어도 남북한의 체제 경쟁에서 패한 상황에서 남북 교류와 통일 논의는 흡수 통일로 갈 수 있음을 김 위원장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배급을 못 주는 노동당보다 밥을 먹게 해준 장마당을 더 신뢰하는 '장마당 세대'가 북한군의 주축이 된 상황에서 '남조선의 자본주의 날라리풍 문화'의 침투는 체제에 큰 위협이다. 이렇다 보니 조부 김일성과 선친 김정일의 통일 흔적까지 거침없이 지우며 쇄국 통치로 퇴행하고 있다. 통일만 되면 배부르게 먹고 잘 살 수 있다며 북한 주민을 세뇌해오다 갑자기 정책을 180도 바꿔 통일을 부정했으니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부적으로 민심 이반이 상당할 것이다. 김 위원장의 통일 지우기는 정치적 도박인 셈이다.

2018년 4월 27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환담하고 있다. 문 대통령 옆에 임종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앉아 있다. [연합뉴스]
2018년 4월 26일 당시 임종석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문재인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의 언론 상대 브리핑 장면.[청와대사진기자단]

반면 임 전 실장의 통일 부정은 소속 정당의 동료 정치인들의 공감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반공이 국시(國是)로 인식되던 1986년 10월 전두환 정권을 향해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당당히 외쳤다는 이유로 구속됐던 유성환 신한민주당 의원의 용기에 빗대기도 민망하다.
그의 통일 부정 발언은 정치적 언행의 일관성 측면에서도 의심받을 만하다. 지난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2019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민간 부문에서 통일 운동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뭐가 크게 달라졌나. 김정은의 통일 부정 선언이 나오자 불과 9개월의 시차를 두고 앵무새처럼 통일을 부정하며 맞장구친 것 아닌가.
당장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통일이란 전략적 목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물론 통일을 외쳤던 86세대가 속속 은퇴하는 마당에 MZ세대를 위시한 요즘 젊은이들은 통일에 극도로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의 통일 지우기에 맞장구친 임종석의 통일 부정론은 '역설적 공로'가 없지 않을 수도 있다. 통일을 부정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기는커녕 영구 분단을 고착시키고, 북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중·러 개입의 여지만 키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일깨워 준다면 말이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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