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까지 파고드는 中인지전…"美견제 위해 반윤·반일 부추겨" [글로벌리포트]
“한국 정부가 갈등을 조정하지 않고 충돌의 선봉에 나섰다.” (2월 26일자)
“보수 세력의 의료 개혁 이슈 추진엔 정치적 고려가 깔렸다.” (3월 6일자)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지난 4월 한국 총선을 앞두고 전문가 칼럼을 통해 이처럼 ‘의대 정원’ 문제를 집중 거론하며 한국 정부와 여권을 맹비난했다. 신문은 왜 중국과 무관한 한국 내 사안에 이렇게 관심을 보일까?
환구시보는 중국 시각에서 국제뉴스를 거칠게 다루는 ‘전랑외교’의 첨병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만큼 특정 보도엔 뚜렷한 ‘목표’가 있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주변국이자 미국의 핵심 동맹인 한국·일본에 대한 ‘인지전(Cognitive Warfare)’을 부쩍 강화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마디로 일종의 여론 공작을 펴고 있다는 얘기다. 주로 현 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확산시켜 사회적인 갈등을 조장하는 게 목표다.
문제는 교묘하게 이뤄지는 인지전 특성상 대응이 어렵다는 점이다. ‘동북아의 안보 환경 변환과 한·일·북·중: 미래전과 디지털 패권’을 주제로 지난 23일 일본 주오사카 한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한국외대 국제지역연구센터, 리쓰메이칸대 동아시아 평화협력 연구센터가 공동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한 한·일·미·대만의 전문가들은 “디지털 패권 경쟁 심화로 중국 등 권위주의 진영의 인지전 위협 수위가 급격히 오르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진영의 공동 대응”을 주문했다.
“반윤·반일 코드로 여론 공작”
주재우 경희대 교수는 특히 환구시보 사례를 심각하게 봤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2022년 3월) 이후 지난 5월까지 한국을 다룬 사설 25편과 칼럼 94편을 분석한 결과 인지전 성격이 뚜렷하다”면서다.
주 교수에 따르면 지난 대선 직후 환구시보엔 “중국과 가깝게 지내야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압박하는 내용이 주로 실렸다. 그런데 윤 정부의 ‘미국 중시’ 기조가 뚜렷해지자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한국에 대한 배신이며 뒤에서 칼을 꽂는 행위”(2022년 9월 3일자) 등 한·미 사이를 벌리는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IRA가 제정되면서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미 당국의 보조금이 삭감된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환구시보는 한국의 외교적인 반발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난해 6월 당시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미국이 승리하고 중국이 패배하는데 베팅하면 반드시 후회한다”고 겁박하면서 한국 측이 항의하자 신문은 이를 “소국(小國)의 마음가짐”(지난해 6월 13일자)으로 격하했다.
급기야 지난해 11월부턴 한국 국내 상황을 깊게 파고들었다. “‘69시간 근무제’가 한국에서 추진되기 어려운 이유”(지난해 11월 17일자), “부산엑스포 예상 밖 참패, 한국이 반성해야 할 점”(지난해 12월 1일자), “한국 의료 위기가 주는 세 가지 경고”(3월 6일자) 등 주로 전문가 칼럼을 통해서였다.
또 신문은 “핵 배출 오염수 믿어도 된다? 서울은 양심 가책 느껴야”(지난해 5월 26일자) 등 반일 정서를 이용해 한국 정부를 공격하기도 했다.
주 교수는 “‘반윤’과 ‘반일’ 코드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한국 내 정치 환경을 만들기 위한 공작으로 보인다”며 “중국이 관영 매체를 통해 ‘영향력 공작’을 전개하는 건 한국의 다수 언론이 이를 인용하는 등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해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법률 동원, 공공외교 위장도
관영 매체뿐만 아니다. 주변국에 영향을 미치는 법률을 제정하는 등 중국의 인지전은 전방위적이다. 강준영 HK+국가전략사업단장은 “중국이 2021년 해경의 무기 사용을 허가하는 내용의 ‘해경법’을 제정했지만, 이후 한국 등 주변국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며 “그러자 중국은 지난 5월 해경법 개정안을 통해 해상에서 나포한 외국인의 구금 기간을 기존 30일에서 60일로 늘리는 등 수위를 더 높였다”고 말했다.
왕쭌옌(王尊彦) 대만 국방안전연구원 부연구원은 유사 사례로 한·일 주변에서의 중국·러시아 군용기 연합 비행을 들었다. 그는 “한·일의 방공식별구역을 무단 침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중국은 한·일이 어떻게 나오는지, 또 미국이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계속 확인하며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공자학원’ 등 공공외교도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나카토 사치오(中戸祐夫) 리쓰메이칸대 부총장은 “공공외교와 (중국의 인지전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며 “그런 점에서 이런 공격을 특정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 대선 이후 인지전 더 강경”
전문가들은 “중국의 인지전 위협을 뜬구름 잡기 식으로 판별해선 대응책 마련이 어렵다”고 지적한다. 김진형 한국외대 교수는 “중국의 인지전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영향력 활동 지수’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민간과 공공 영역에서 중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인지전을 펴는지 객관화하자는 것이다.
이 외에도 전문가 사이에선 “중국의 공작에 취약한 계층을 파악해 사회 분열을 막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모치나가 다이 시바우라공업대 교수), “선거 개입 등 중국의 인지전 피해가 심각한 대만과 연대도 필요하다”(정기웅 한국외대 교수), “한·일 간 사이버 공격 정보를 공유하는 등 허위정보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 등의 의견이 나왔다.
오는 11월 미 대선 이후 미국의 ‘중국 때리기’가 가속하면서 중국의 인지전이 더 강경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와 관련, 한석희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은 “누가 차기 미 대통령이 되든 대중국 정책의 ‘엔드게임’이 없는 상황”이라며 “미·중 두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긴밀히 협력하는 틀을 갖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진창수 주오사카 총영사는 “미 대선 결과에 따라 국제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힘들다”며 “이런 다양한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가 한국의 외교 전략상 화두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상진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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