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상의 세상만사] 어느 남파공작원의 재심 신청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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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세상을 떠날 나이인 98세에 재심 신청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남파공작원 엄주분의 기구한 일생 이야기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홀로 월북한 엄주분은 1957년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이것이 어쩌면 남파공작원 엄주분이 재심을 신청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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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세상을 떠날 나이인 98세에 재심 신청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직업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같은 성씨라는데 끌려 그녀의 일생이 몹시 궁금해졌다. 남파공작원 엄주분의 기구한 일생 이야기다.
1925년생인 엄주분은 공주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영명소학교 시절 은사인 윤영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해서 19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시절 충남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에서 청년부장으로 일하던 박천평과 혼인의 연을 맺어 딸을 낳았다. 박천평은 남한 빨치산 조직 남부군의 사령관인 이현상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홀로 월북한 엄주분은 1957년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당시 아무런 연이 없는 3살짜리 고아를 딸인 것처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엄주분에게 시급한 문제는 당장의 생존이었다. 공작은 커녕 이들 가짜 모녀는 생존할 길조차 막막했다. 자갈치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아주머니를 만나 그 집에 머물면서 이런저런 공장에 취업하기도 했으나 늘 수입이 부족했다. 그래서 장사할 돈을 마련하려고 북에서 가져온 달러를 환전하려다 부산 해병대 특무대에 발각됐다. 그때가 1958년 11월이다. 체포될 당시까지 딱히 ‘공작’이라고 할 만한 간첩 활동을 한 게 없었다.
그 시절 일상이었던 고문이 가해졌다. “해병대에서는 의자에 잡아매 놓고 무조건 그냥 골격을 때리는 거예요. 아프고, 다 토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물이 흐르는 중에서 하는 거(물고문)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정신없이 전기고문을 하는데...나중에는 오줌을 누어서 오줌이 여기 얼굴에 묻어가지고 범벅이 돼가지고...” 엄주분이 당시의 고문에 대해 진술한 내용이다.
체포된 뒤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약 8개월 가까이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모진 고문을 받았고, 이때 자백한 증거를 근거로 재판이 진행됐다. 간첩죄로 기소된 엄주분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1960년 8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수감 중이던 1962년에 전향했고, 1979년에 가석방될 때까지 20년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엄주분과 가까이 지냈던 두 명의 이웃 또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한 허위자백으로 인해 간첩방조죄로 기소되어 징역 7년과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해야 했다.
엄주분은 가석방 이후 안양의 한 교회를 중심으로 호스피스, 화단 관리, 화장실 청소 등 봉사활동을 하며 40여 년간 조용히 살았다. 그러던 중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이웃들의 명예가 조금이라도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재심을 신청했다. 그러나 재심 개시 결정조차 보지 못한 채 최근 9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우리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에게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간첩’은 ‘적국을 위해 국가기밀을 탐지·수집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간첩 행위의 상대를 ‘적국’에서 ‘외국 정부 또는 외국인 단체에 소속된 외국인’ 등으로 확대하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우호 관계에 있는 외국에 군사기밀을 유출하는 경우나 적국이 아닌 외국 정보기관의 간첩 활동에 대하여 간첩죄 적용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하다면 개정은 당연하다. 다만, 법치국가의 원리 및 죄형법정주의로부터 도출되는 책임주의 원칙은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책임 없으면 형벌 없고, 책임의 크고 작음에 따라 형량도 크고 작아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남파공작원 엄주분이 재심을 신청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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