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전미경 2024. 9. 2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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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와 청풍호로 유명한 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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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경 기자]

내가 정착한 이곳은 인구 십이만의 작은 소도시. 의림지와 청풍호로 유명하고 인구소멸을 막기 위해 고려인 이주를 실행하고 있으며 지난 9월은 처음으로 영화관 없이 국제음악영화제를 치렀다. 모두 나와는 상관없이 정해지고 흘러가는 것들이다.

이방인 같은 이 도시에서 내가 하는 유일한 모임이자 사회 활동은 교육청 청렴 서포터스 활동이다. 서포터스라고는 하지만 정기적 모임이 아닌 1년에 서너 번 정도의 활동인데 참석여부는 자유롭기에 부담이 없다.

참석시엔 보통 미디어 교육을 받거나, 줍깅(거리청소)을하고, 청렴 관련 영화를 보기도 하는데 (유일한 영화관 CGV가 사라져 더 이상은 볼 수 없다) 이번엔 청렴 문화유적 탐방 활동이었다.

서포터스 회원 6명 중 3명이 참석하였고 교육청 직원과 청렴사회협약단체인 학교운영위원회원으로 구성된 인원포함 약 17명 정도. 버스까지 대절하였으니 이런 대규모 행사는 서포터스 3년 만에 처음 있는 활동이다.

이곳에 살면서도 한 번도 이곳을 탐방해 본 적이 없었으니 이번 활동은 그 어느 때 보다 기대가 되었다. 날이 맑은 9월 25일 오후 2시 교육청에 집결하여 첫 장소인 봉양 제천의병전시관으로 향했다. 시에서 20분 거리를 벗어났을 뿐인데 자연의 운치가 남달랐다.

탁 트인 시야와 고즈넉한 고택을 기준으로 의병기념탑, 자양영당, 장판각 이 조용하게 자리 잡고 그 옆으로 커다란 현대 건물 의병전시관이 보였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해설사와 짧은 인사를 하고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실감 나게 설명하는 해설사를 통해 의병활동을 들으니 그때의 역사가 살아 꿈틀대는 것 같아 우리는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의병 전시관을 둘러보며 해설사를 따라 이동하는데 설명을 건너뛴 해설사와 달리 내 시선을 한참이나 붙들어둔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제천에 이르렀을 때는 햇살이 뜨거운 초여름이었다.'로 시작되는 한 문장이다. 나는 이동하는 무리들에 뒤쳐진 체 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관심 없는 사람이라면 스쳐 지날 법한 벽면에 붙어있는 문구였지만 그 글은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모티브가 된 영국기자 매킨지의 기록이다. 나는 한참이나 서서 그 기록을 읽고 또 읽으며 당시의 참혹함을 겹쳐 상상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제천 시내 한가운데 아사봉에는 펄럭이는 일장기가 밝은 햇살 아래 선명하게 보였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 또한 빛났다. 나는 말에서 내려 잿더미 위를 걸어서 거리로 들어갔다. 이렇게 까지 완전히 파괴된 것을 이전에 본일이 없었다. 한 달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거리였었는데 (중략) 조선의 비극 중'

이방인의 시선에 기록된 당시의 비극은 처절함 그 이상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폐허 속에서 이어온 지금의 이곳. 현재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수 있었던 힘의 원천 앞에서 먹먹해져 쉬이 발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맥켄리의 기록에 하염없이 빠져 있던 나와 달리 의병 활동에 초점을 맞춘 해설사의 설명이 끝나갈 즈음 의병의 고장답게 일행 중에 의병에게 도움을 준 후손이 있어 뜨거운 함성과 박수세례를 받았다.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다.

맥켄리의 그날처럼 뜨거운 초여름은 아니지만 무더위가 여전한 초가을 전시관을 나서며 해설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싸우면 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고" 한 의병의 외침이었다.

죽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시대의 얄팍한 나지만 만약 그 시대의 나라면...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이름 없는 의병의 외침은 한없이 애절하기만 하다.

그 시대의 의병처럼 설명 내내 사명감과 자긍심으로 무장한 해설사는 더 궁금한 것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지만 이미 예정시간 40분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나는 궁금했던 것이 있었지만 질문하지 못하고 다음날 전시관에 따로 전화를 걸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의병의 주역 성재 유중교 선생의 고택 앞에 서있는 큰 나무 이름이었다. 처음 보는 나무였는데 갑옷을 입은 장군처럼 웅장한 모습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것인데 담당자는 그 나무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생각이 안 난다며 호탕하게 전화를 끊었다.

의병활동과 무관하니 나무 이름을 모른다 해도 괜찮고 나무 이름을 묻는 질문이 오히려 엉뚱하다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도 잠시 담당자는 금방 다시 전화를 걸어와 위성류라는 중국 나무로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나무라고 했다.

1890년도 즈음이니 100년은 더 됐을 거고 어떻게 들여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복원 사업 당시 그 나무는 살리고 고택을 복원했다고 설명했다. 이국만리에 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위성류야말로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가 아닐까 싶다.

말없이 마을을 지켜왔을 위성류의 위엄을 뒤로한 채 10여분 거리에 있는 한국차박물관으로 이동했다. 폐교를 매입해 만든 개인 박물관인데 해설사이자 관장님은 <차를 알고, 나를 알고>란 책을 낼 만큼 보이차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

교무직을 은퇴하고 버킷리스트 1호이자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싶어 서울 수십억 짜리 아파트를 팔아 이곳에 자리 잡고 박물관을 만들었다는데 돈은 안 된다면서도 좋아서 하는 일이라 그런지 즐거움이 가득해 보인다.

박물관 전체가 보이차 및 보이차 역사로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단호박 크기만 한 보이차 하나를 가리키며 2억이 넘는다고 한다. 사실일까 검색 해봤는데 실제 작년 보이차 거래 플랫폼 '에세티'라는 곳에서 골동품급 보이차가 2억천에 낙찰되었다는 뉴스가 있다.

보이차 100g에 2750만 원 짜리도 있다니 그야말로 차테크다. 그 소리에 일행 중 한 명이 24년 전 북경서 사온, 방치해 뒀던 보이차를 언급 하면서 관심을 표했는데 생차가 아닌 숙차라는 말에 큰 기대는 없는 눈치다.

보이차는 와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고 하니 부호들 사이에서는 차테크가 활발하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먼 나라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보이차 명상을 겸한 시음회 장소에는 오유지족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나는 오로지 만족한다는 설명에 첨언하면 분수에 맞게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자는 풀이로 보인다. 우리 일행에겐 언제든 무료로 보이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관장님이지만 언제쯤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일행과 다음에 같이 꼭 다시 오자고 약속하지만 그럴 기회가 있으려나.

탐방을 하는 내내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제천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탄성을 자아냈다. 모두들 제천에서 오래 생활했지만 이런 곳이 있는지 조차 몰랐거나 시시하게 생각해서 다녀가지 않았으리라.

나 역시 내가 있는 이곳보다는 무조건 더 멀리멀리에서만 무언가를 찾으려 했었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 국내보다는 해외로 향했고, 내가 사는 지역보다는 타 지역만 찾아서 쫓아다녔으니 정작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새로움과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다른 곳을 부러워하는 강 건너 사랑을 하고 있었다.

기차역을 지날 때 가끔 단체 관광객들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래 이곳도 타 지역 사람들에겐 관광지였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곳을 돌아볼 생각은 안 했던 거 같다.

오래 보았지만 어느 한순간 어쩌다 발견한 연인의 매력처럼 이제야 조금씩 스며드는 이 도시의 반짝임. 역사 없는 도시가 어디 있겠냐만은 현재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생동감이 오늘따라 가슴 뭉클한 전율로 다가온다. 역사는 활동하는자의 것이란 말처럼 이제부터라도 먼곳이 아닌 내가 속한 이곳부터 속속들이 둘러보고 사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곧 한마음 축제가 시작되고, 다음 주면 한방엑스포가 열린다. 끊임없는 구애에도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외면하며 살아낸 도시였지만 앞으로는 애정하는 마음으로 내가 있는 이곳에서 파랑새를 찾으며 소중한 일상을 담아보려 한다.

이번 문화유적 탐방활동을 통해 얻은 가치는 소멸없는 도시의 공존이다. 활동은 형식이 아닌 진정성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외적 내적 모든 것과 한 뼘 더 친밀해진 탐방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누구라도 머물고 싶은 자연치유도시, 가슴 벅찬 이 도시를 천천히 알아가며 다시 만나볼 생각이다. 누가 위촉하진 않았지만 자발적 시민 서포터스로서 말이다. 이제 이도시와 사랑에 빠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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