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땐, 카레덮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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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혜란 기자]
▲ 가을초입의 거리풍경 |
ⓒ 어혜란 |
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손님처럼 창문을 타고 느닷없이 불어온 선선한 가을바람. '드디어 왔구나. 입대한 남자친구의 첫 편지를 받은 것처럼 어찌나 반갑던지.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일교차가 제법 벌어져서 아침저녁으로는 꽤 쌀쌀한 바람이 분다. 어느새 맹렬하던 태양의 열기도 힘이 빠진 듯 누그러들었다. 길가에 핀 나무들도 형형색색 점점 색을 바꾼다.
유난히 무덥고 습한 날씨 탓에 기운 빠지고 식욕이 실종되는 여름을 보냈지만, 어느새 헛헛한 마음을 따스히 덥혀주는 덮밥이 맛있어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그렇다. 가을은 덮밥을 먹기에 딱 맞는 계절이다.
오랜만에 카레덮밥에 도전하기로 했다. 사실, 카레는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요리다. 물론 그 누.구.나 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 나는 사실 '카레 하수'다. 카레 만들기를 어려워한다는 얘기다. 웬만한 파스타도 뚝딱 만들고, 감칠맛 나는 한식도 곧잘 만들지만 유독 카레가 나의 요리 인생에 발목을 잡았다.
첫 카레를 만들게 된 건 5년 전이다. 신혼 초였고, 초보 주부였지만 누구나 쉽게 만든다는 카레는 시도하기 좋아 보였다. 호기롭게 도전했다. 재료를 먹기 좋게 다듬고, 분말카레가 다른 재료들과 잘 섞이도록 물에 잘 풀어 주었다.
양파, 고기, 감자, 호박 순으로 재료들을 적당히 볶고 레시피에 적힌 대로 물을 붓고 뭉근히 끓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비해둔 카레 분말을 넣어주면 끝. 따로 간을 맞출 필요도 필요도 없다. 이 얼마나 쉬운 요리인가.
당연히 평소에 접했던 대로 걸쭉한 카레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웬걸! 그야말로 카레탕(?)이 된 것이다! 물 조절에 실패한 카레의 모습은 참담했다. 마치 홍수라도 난 듯 냄비를 가득 채운 샛노란 카레탕에는 갈 곳을 잃은 짐들이 떠다니듯 감자, 고기, 호박 등 각종 재료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 누가 카레를 쉽다고 했던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남편은 그날 짜디짠 카레탕(?)을 밥 따로 국물 삼아 떠먹으며 초보운전도 처음엔 다 서투른 법이라며 씁쓸한 위로를 건넸다. 나는 정말로 이 쉬운 요리를 내가 실패할 리 없다며 다음 번엔 꼭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얼마 후 또다시 시도한 카레. 역시 실패였다. 또다시 홍수가 터진 냄비를 보고 있자니 주눅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카레 요리는 재능이 없는가 보다. '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인도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섬세한 묘사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줌파리히리는 고국 음식 카레를 유난히 책 속에서 맛깔스럽게 그려내고 있었다. 알싸한 강황향이 책을 뚫고 집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마지막 카레를 만들었던 것이 벌써 3년 전이었던가. 이쯤이면 요리 실력도 어느 정도 레벨 업 되었고, 다시 시도해 보아도 될 듯싶었다. 마침 가을의 초입에 다가선 날씨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카레덮밥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을까?' 망설여지긴 했지만. '못할 것도 없지 뭐' 도전하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재료들을 구입하고 카레 만들기에 돌입했다. 더 이상 물 조절에 실패한 카레는 내 인생에 없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매의 눈으로 물과 분말의 정확한 비율을 맞추는데 심여를 기울였다.
▲ 그날 만든 카레 |
ⓒ 어혜란 |
역시 처음부터 잘 되는 건 없다. 실패한 카레를 마주하지 않고서 꿀맛 카레를 맛볼 수 없듯, 실패를 통하지 않고서 성공으로 이르는 길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오늘도 고쳐 쓰기로 했다>의 김선영 저자 말처럼 글을 잘 쓰는 확실한 방법은 '고쳐쓰기'뿐이고, 요리를 잘하는 확실한 방법은 실패하고 또다시 도전하며 요리법을 고쳐나가는 것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원하는 목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친 암벽을 오르듯 실패하고 또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믿고 끈질기게 도전하는 사람만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 꿈을 이루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면 언젠가 그 꿈은 현실이 된다.
실패에 좌절하기보다는, 작은 한 걸음이라도 계속해서 나아가자. 꿈을 향한 여정은 언젠가 값진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도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도 이제 카레 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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