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만세 시위를 벌이자 어른들도 동참

정만진 2024. 9. 29. 10: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독립운동가 17 ] 9월 29일 타계한 김진호, 김호용 지사

[정만진 기자]

 상동교회에 부착되어 있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시설' 안내문
ⓒ 국가보훈부
구한말 구국운동의 중심지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서울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이다.

상동교회는 1897년 전덕기(全德基, 1875-1914)를 비롯한 40여 명의 청년들이 교회 내에 엡워스 청년회를 조직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독립협회의 정신을 계승하여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국권수호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어 조직적인 반대 투쟁도 펼쳤다. 1907년 4월 결성된 신민회에서도 상동교회 출신의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동교회는 1888년 10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W.B.Scranton)이 의료선교를 위해 세웠다. 1974년 옛 교회 예배당을 헐고 1977년에 새 건물을 지었다.

위 인용문은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1-1 소재 상동교회에 부착되어 있는 '국가보훈부 지정 현충 시설' 안내문 전문이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 정보서비스의 '시설 내용'도 대략 내용이 비슷하다.
상동교회는 1901년 기독교 스크랜튼 선교사가 설립한 감리교 교회이다. 1904년 교회 안에 여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공옥학교와 병행하여 청년학원을 세워 민족지도자를 양성하였으며, 1907년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면서 독립운동의 비밀본부 역할을 하였다.

이 학교의 교감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등이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을 추진하였으며, 헤이그 밀사파견의 산실이 되었다. 이 교회는 민족운동에 참여한 많은 인재들을 길러 내었는데, 이동녕, 박용만, 이승만 등이 이곳에 속하여 있었다.

신민회 경상도 대표로 활동한 김진호 성경교사

'민족운동에 참여한 많은 인재들' 중 한 사람인 김진호(金鎭浩) 지사는 1873년 10월 20일 출생했다. 경북 상주 이안면 가장리 138번지가 본적으로, 1908년 이후 상동교회 청년학원 역사교원, 1911년 상동교회 전도사, 1916년 배재학교 성경 및 한문교사로 재직했고, 신민회의 '경상도 대표'로 활동했다.

김 지사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러시아 영사관, 중국 영사관 등에 전달하고 배재학교 학생들을 시위에 동원한 일로 체포되어 그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60년 9월 29일 타계했다.
 김진호 지사, 서울 상동교회 전시실, 김호용 지사
ⓒ 국가보훈부
1948년 9월 29일 김호용(金浩溶)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1905년 2월 17일 출생했으니 향년 43세였다. 본적은 경북 영천 신녕면 완전리 89번지로, 1919년 독립만세운동 당시 신녕보통학교 학생이었다.

14세 김호용은 황정수, 박칠성, 김해오 등 다른 학생들과 함께 4월 6일 신녕면 완전동 노영수의 집에 모여 태극기를 나무에 걸어놓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것을 시작으로, 밤에는 조윤이까지 합세해 매양동에서 가두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일반 주민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시위 후 끌려간 46세 전도사와 14세 학생

신녕 주재소 경찰들에게 체포된 김호용은 재판에 회부되어 그해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겨우 14세밖에 안 된 김호용이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법정까지 끌려가 벌벌 떨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고문 당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는 1919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의 "3월 26일경 교사 박필환이 운동장에서 왕산동에 거주하는 생도를 모아 만세를 부르며 구한국 독립의 시위운동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에 동일하게 만세를 불러 독립을 도모할 것을 (김호용 등이) 계획"하였다는 대목이다. 일제 경찰은 아이들을 구타하면서 '배후'를 추궁하였을 것이고, 결국 박필환 교사가 소환되었을 터이다.

김호용 지사는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묘소 정보'에 "산골: 유골을 화장하여 산이나 강, 바다 등에 흩뿌려 묘소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로 기록되어 있다. 묘소가 없는 독립유공자의 경우 호국원에 가묘를 설치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