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임수는 자신을 갉아먹는다[정현권의 감성골프]

2024. 9. 28. 09:1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코스에서 모처럼 쭉 뻗는 장타를 날렸다.

OB(Out of bounds) 경계선 약간 밖에 공이 놓여 있었다. 친한 사이에 가벼운 스킨스 게임이라 말없이 무벌타로 그대로 진행했다.

자진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티샷과 퍼트가 흔들렸다. 스코어가 좋을 리 없었다. 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프로세계에선 있을 수 없다. 속임수는 골프 규칙 제1조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갤러리나 TV 중계화면을 통해 뒤늦게 발각되면 실격은 물론 자격정지도 당한다.

“실수를 저지른 게 틀림없다고 느꼈고, 명확하게 밝히고 싶었다.” 지난 8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플레이오프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 3라운드에서 규칙 위반을 자진 신고한 사히스 티갈라(미국)의 고백이다.

그는 3번홀 벙커샷을 하다 클럽으로 모래 알갱이를 미세하게 건드린 것 같다고 동반자에게 알리고 경기위원에도 자진 신고했다. 벙커샷 룰 위반 은 방송 화면을 돌려봐도 판독하기 어려웠다.

그는 “확실하게 룰을 위반했고 대가를 치렀지만 기분 좋다”며 “만약 신고하지 않았다면 잠을 못 이뤘을 것”이라고 재차 밝혔다.

여기서 받은 2벌타가 아니라면 투어 챔피언십 3위가 아닌 공동 2위에다 보너스도 750만달러가 아닌 1000만달러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 돈 33억원을 날리는 대신 양심을 지켰다.

지난 20일에는 국내서도 규칙 위반을 자진 신고한 사례가 나왔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장수연이 서원밸리CC에서 열린 대보 하우스디 오픈 1라운드 10번 홀에서 프리퍼드 라이(Preferred lie) 규정을 착각해 1벌타를 받았다.

골프 규칙은 ‘코스는 있는 그대로’ ‘볼은 놓인 그대로’ 경기하는 것을 대전제로 한다. 하지만 악천후로 코스에서 제대로 경기할 수 없다면 프리퍼드 라이(preferred lies∙공 옮기는 것 허용)를 적용한다.

도저히 진행할 수 없는 곳에 놓인 공을 집고(lift) 닦고(clean) 옮겨서(place) 치도록 한다. 한마디로 더 좋은 곳에서 치게 하는 규칙이다. 벌타 없이 공을 집어서 닦지만 원래 자리에 다시 놓는(replace) 클린 볼(lift and clean ball)과는 다르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정하는 로컬룰(해당 코스에만 적용)에 따라 프리퍼드 라이 세부 규정이 대회마다 달라 방심하면 무더기 벌타를 받는다.

이 날 장수연은 앞서 열렸던 2개 대회와 동일하게 프리퍼드 라이 규정이 적용되는 줄 알고 1번홀 페어웨이에 있던 공을 집었다. 이번 대회에선 이 규정이 시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폭우 속에 열린 앞선 대회에선 짧게 깎인 일반 구역 잔디에 공이 놓이면 벌타 없이 홀에 가깝지 않게 한 클럽 이내에 옮기도록 했다.

캐디에게 이 사실을 전달받은 장수연은 자진 신고해 1벌타를 받았다. 이에 따라 1번 홀에서 기록한 버디가 파로 바뀌었다.

2016년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에서 베테랑 우에하라 아야코가 이 규칙을 착각해 무려 68벌타를 받고 69오버파 141타를 쳤다. 당시 에는 공을 닦고 원래 위치에서 치도록 한 로컬 룰을 착각해 한 클럽 이내에 옮겨서 친 결과이다.

리디아 고(26·뉴질랜드)도 작년 7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다나 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프리퍼드 라이 규칙을 착각해 7벌타를 받았다. 전날 엄청난 폭우로 인해 조직위원회는 마지막 날 1번 홀(파4)과 10번 홀(파4)에만 이 규칙을 적용했다.

LPGA투어에선 보통 1클럽 이내에 공을 옮겨서 치도록 한다. 그녀는 코스 전체에 적용되는 줄 알고 3번과 7번, 9번 홀에서도 공을 옮겼다.

11번 홀에서 규칙 위반을 깨닫고 경기위원을 불러 사실을 알렸다. 앞서 3개 홀에서 다른 곳에 공을 옮긴 규칙 위반으로 2벌타씩 6벌타에 이유없이 공을 집은 11번홀 룰 위반 1벌타를 더해 총 7타를 잃었다.

지난 8일엔 애매한 상황이 나왔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KB금융 스타챔피언십 최종일 김효주(29)가 40초 이상 기다려 버디를 잡았다.

벌타 논란이 있었지만 벌타 없음으로 결론났다. 이천 블랙스톤에서 열린 대회에서 김효주는 4번홀(파4) 그린 주변 프린지 5m 거리에서 웨지로 볼을 톡 떠냈다.

공이 핀에서 5c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놓였다. 아쉬워하던 김효주는 30초가 지나도록 공이 꿈쩍하지 않자 다가가서 퍼터로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동반 선수 박지영(28)의 만류로 결국 46초 후에 공이 홀 인했다. 일명 10초룰을 어긴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골프 규칙에 따르면 선수가 홀에 다가간 뒤 10초 이내에 떨어져야 직전 스트로크로 인정된다. 공이 홀 가장자리에 걸쳤다면 10초 룰이 적용되지만 동영상 판독 결과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고 판단됐다.

즉 박지영이 김효주를 막고 나서부터 공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경사에 일시 정지한 공이 중력으로 인해 6초만에 홀에 흐른 것으로 해석했다.

골프 명언은 인간의 취약한 본성을 그대로 간파한다. 유구한 골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골프란 최악의 적인 자신과 플레이하는 것이다.”(핀리 피터던) “18년간 탁자에서 상대한 것보다 18홀 매치플레이를 해보면 상대를 더 잘 안다.”(그랜트랜드 라이스)

2021년 노르웨이에서 TV 중계를 보던 어머니가 미국에서 경기(PGA)를 끝낸 아들 호블란에게 규칙 위반 사실을 전화로 알려 자진 신고토록 한 사례는 양심 승리다. 마크한 곳에서 원래 자리로 공을 옮기지 않고 퍼트를 한 것 같다며 경기후 주차장으로 향하던 아들에게 전화했다. 호블란은 자진 신고로 2벌타를 받았다.

1925년 US오픈에선 선두였던 보비 존스가 러프에서 살짝 공을 움직였다고 스스로 신고해 상대에게 우승을 넘겨줬다. 당시 매스컴의 칭찬에 대한 그의 반응이 레전드급이다.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다. 그럼 내가 은행 강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칭찬할 것인가.” 속임수는 자신을 갉아 먹는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