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랩소디]③ 새로운 ‘해방 일지’ 쓰는 후암동…MZ성지로 변신중
“서울시는 용산구 후암동 30-2 일대(동후암1구역)와 영등포구 신길동 314-14 일대를 신통기획 재개발 후보지로 선정했다.” (3차 재개발 후보지 선정위, 6월 27일)
“서울시는 용산구 후암동 264-11 일대(동후암3구역)와 중랑구 중화동 309-39 일대를 신통기획 재개발 후보지로 선정했다.” (4차 재개발 후보지 선정위, 8월 28일)
서울시가 재개발 정책으로 집중 추진 중인 신통기획. 올해 들어 열린 선정위 결과에서 공통 분모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용산구 후암동이다. 후암동은 서울역과 남산 자락 사이 자리한 동네다. 용산2가동과 함께 ‘해방촌’으로 불리는 곳. 한때 ‘달동네’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신흥시장과 후암재래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카페들, 특히 루프탑(옥상 정원)이 여러 생기며 젊은 세대(MZ)들의 핫플레이스로 변모 중이다.
사통팔달 요지로 부상
후암동은 조선 시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이름은 두텁바위(厚岩), 즉 두꺼운 큰 바위가 마을 한가운데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자손이 귀한 사람들이 찾아와 바위 앞에서 자손 얻기를 빌었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용산도서관 옆에 두텁바위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후암동은 조선시대 당시 가파른 구릉지로 주거 환경으로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조선왕조실록』등에도 후암동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다.
후암동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계기는 개항 이후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철도에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이 생기면서다. 1900년 자그마한 목조 건물로 처음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배후 지역으로 후암동이 눈길을 끌었다.
비약적 발전의 계기는 일제가 서울(당시 경성)의 동선 축을 바꾸면서다. 바로 중앙청(현 광화문)~경성부청(현 서울시청)~남대문정거장을 잇는 신작로(현 세종대로)를 건설했다. 그리고 남대문정거장의 이름을 경성역으로 바꾸고, 1925년 르네상스-바로크 양식의 대형 역사(현 문화역 서울284)를 지었다.(국가철도공단『철도역 이야기』)
후암동은 사통팔달의 요지가 됐다. 1930년대 들어 충무로·명동 못지않은 일본인 거주지로 발전했다. 고급 서양식 주택을 뜻하는 ‘문화주택’이 대거 들어섰다. 이곳에 일본인 관료와 금융인 등 유력자들이 많이 살았다. 대표적인 곳이 조선은행 사택 주변이다. 터에는 현재 후신인 한국은행의 직원 공동숙소인 후암생활관이 들어섰다.
박연숙 한은 재산운영팀장은 “조선은행 사택은 여러 차례 증·개축을 거쳤다”며 “현재 건물은 주변 부지도 사들여 2006년 재건축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 문화주택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해방촌으로 변한 적산가옥
고급 주거지였던 후암동의 운명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180도 바뀌게 된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이 되면서다. 적의 재산이란 뜻으로 패망한 일본 개인과 기관의 집을 의미한다.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작정 귀국길에 올랐다.
결국 적산가옥은 무주공산이 된 것. 서부 개척 시대처럼 먼저(Sooners) 비어 있던 곳을 점유해 자기 집으로 삼는 ‘노다지(No Touch)’ 현상이 생겨났다. 해외 동포의 귀국과 정처 없이 상경한 사람들로 서울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며 38선을 월남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이들이 대거 향한 곳이 후암동이다. ‘해방촌’이란 별칭을 얻게 된 계기다. 미 군정은 이들에게 적산가옥을 일부 불하했지만, 이미 불법 점유한 사람과의 갈등이 심해졌다. 일부 가옥의 절반은 불하받은 사람이 살고, 절반은 불법 점유한 사람이 사는 형태도 나타났다.
한국전쟁(6·25) 이후 고향에서 온 다른 가족까지 얹혀살기도 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전락하게 된 것. 이런 사회상을 담은 문학 작품도 바로 나왔다.
『오발탄』의 배경 되다
“가자! 가자!”
영화로도 큰 화제를 모았던 1959년 이범선의 단편 소설 『오발탄』의 상징적 대사다. 정신 이상이 된 주인공 철호의 어머니가 외친 말이다. 이곳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해방촌’ 후암동이다. 한국전쟁 이후 꿈과 이상을 잊고 살 수밖에 없는 월남한 실향민의 가난한 해방촌 생활을 담아냈다.
주인공 철호의 어머니는 “(북으로) 가자”는 말만 하며 미쳐 있는 상황. 여동생은 양공주로 근근이 돈을 버는데, 직장을 잡지 못한 남동생은 결국 은행 강도로 돌변한다. 만삭의 아내도 결국 아이를 낳다 죽는다. 택시 기사로부터 목적지가 없는 ‘오발탄’이란 비아냥 섞인 말을 듣는다.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삼팔(38)따라지’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편찬한 『국어대사전』(1961년)에 처음 나온다. 이 사전에서 ‘38선 이북의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풀이했다. 볼품 없는 사람을 뜻하는 ‘따라지’에 38선에서 월남한 실향민을 붙여 일컫는 말이다.
61년 5·16 직전 유현목 감독은 이 소설을 배경으로 김진규·최무룡·윤일봉 등 당대 최고 인기 배우를 출연시켜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5·16 직후 군부는 “가자!”라는 대사가 월북을 상징하고, 빈민의 삶을 너무 어둡게 그렸다는 이유로 상영을 3년간 금지했다. 이 영화는 2012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에서 최고의 영화라는 영예를 안았다.
108계단의 대변신
108계단은 달동네 해방촌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계단은 적산가옥과 함께 일제 강점기의 잔재다. 계단이 생긴 건 태평양전쟁, 즉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이다. 일제는 전몰장병 추모를 위해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를 지었다.
후암동 아래쪽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참배하기 편하게 계단을 만든 것. 해방 이후 주민들이 오가는 계단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가파른 계단 탓에 노약자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한때 일제 잔재라 아예 폐쇄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을 이뤄냈다. 후암동 골목 상권이 커져 관광객 발길이 이어지길 바란 것. 결국 2018년 108계단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다. 계단 중앙 2m 너비의 땅을 파서 15인승 경사형 승강기가 설치된 것.
지하철을 제외한 서울 시내 주택가 내부에 설치한 첫 번째 경사형 승강기다. 계단도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게 승강기 주위에 방호 난간도 둘렀다. 일제 강점기 아픈 역사가 담겼다는 알림판도 승강기 앞에 놓았다. 주변에 ‘남산 가는 골목길(마을 흔적 여행길)’과 ‘역사문화 탐방로(역사 흔적 여행길)’ 등 테마 길도 조성됐다.
용산구 도로과 관계자는 “108계단에 승강기 설치 이후 새롭게 생긴 카페와 식당들이 눈에 띈다”며 “골목 상권이 확대돼 이곳을 찾는 관광객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 일제가 108계단을 조성한 이유인 경성호국신사는 어디에 있을까? 중앙일보가 신사가 있던 곳을 확인한 결과, 현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일부 남아 있는 옹벽 옆에 여성 관련 복지시설이 지어져 운영되고 있었다.
신통 재개발로 관심 집중
달동네 이미지가 농후했던 후암동은 새로운 바람을 타게 된다. 인근 이태원과 경리단길에서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자영업자가 쫓겨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 기회가 됐다.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후암동과 해방촌 일대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
108계단 현대화와 함께 해방촌 중심이던 신흥시장이 부상했다. 노후한 재래시장이 맛집과 카페촌으로 바뀌었다. 주변에도 남산과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루프탑 카페도 들어섰다. 신흥시장에 이어 서울역 쪽 방향 후암재래시장 일대도 변하고 있다. 특히 대표적인 곳이 연예인 노홍철이 운영하는 카페 ‘홍철책빵’이다.
30대 직장인 정진이씨는 “서울역 인근에서 가장 핫한 곳이 요즘 후암동”이라며 “KTX나 공항철도를 타고 오는 지인들과도 약속 잡기도 편하다”고 말했다.
이미 후암동 서쪽 서울역 방향의 동자동 일대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찬 마천루로 변했다. 후암동도 동자동 못지않은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한병용 서울시 주택정책실장은 “후암동 일대는 현재 기반 시설이 열악한 지역”이라며 “신통기획 재개발 사업을 통해 주거환경이 개선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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