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웃기는 인생] 북페어에서 가산 탕진하기
내가 아는 시인이나 작가 중엔 집에 책이 너무 많아 도서 보관용으로 창고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도 몇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들은 집에 책이 잔뜩 있는데도 새 책만 보면 군침을 흘리며 신용카드를 내민다. 좋아하는 작품은 전자책보다 종이책으로 사서 책꽂이에 꽂아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라서 계절마다 넘쳐나는 책꽂이를 정리하느라 신경전을 벌인다. 책의 무게와 부피가 가장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이사할 때다. 이삿짐 중에도 책은 가장 무거운 품종이라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보령으로 이사하면서 책 홍역을 치렀다. 플라스틱 박스를 사 ‘태백산맥’ ‘지리산’ 등 대하소설과 예전에 구독하던 영화잡지·문학잡지 등 당장 펼쳐 볼 계획은 없지만 그래도 버리기엔 아까운 책들을 넣어 베란다에 쌓아두었다. 집이 좁아져 책꽂이 칸도 그만큼 좁아진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번의 고비가 다가왔다. 군산에서 열리는 군산북페어였다. 예전 같으면 너무 멀어 포기했겠지만 보령에서 군산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밖에 안 걸린다. 더구나 이젠 중고 자동차도 한 대 있다. 못 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다짐했다. 그래, 가서 구경만 하고 오는 거야. 김탁환 작가가 신작 소설을 거기서 최초로 판다고 하니 인사도 할 겸 겸사겸사 가는 거야. 이번엔 구경만 하자. 구경만.
이틀간 열리는 군산북페어는 규모가 굉장했다. 넓은 행사장에 출판사 부스들이 빼곡했고 참가자와 군중이 섞여 북새통을 이뤘다. 마스크를 쓴 여성분이 아는 체하길래 쳐다보니 ‘남해의봄날’ 정은영 대표였다. 반갑게 인사하고 남해의봄날 부스에 가서 김탁환 작가의 신작 소설 ‘참 좋았더라’를 구입했다. 부스를 돌아다니다가 제주 ‘소리소문’의 정도선 대표를 만났다. 출판기획자이기도 한 아내 윤혜자 작가는 책방 소리소문이 세계적인 독립서점 리스트에 오른 걸 축하했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북페어나 국제도서전의 열기는 언제나 뜨겁다. 이런 행사마다 유독 젊은 여성이 많은 것을 ‘텍스트힙’이란 단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정 대표의 말에 아내는 “요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서전이래요”라고 했다. 정 대표는 생각지도 못했던 해석이라며 좋아했지만 나는 그만큼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폭력이나 멸시의 위험에 노출돼 있구나 하는 생각에 좀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김 작가와 만나 인사를 하고 줄을 서 아까 산 그의 신작 소설에 사인을 받았다. 김 작가와 ‘살아야겠다’ 같은 문제작을 냈던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가 와 있길래 반갑게 악수했다. 김 작가는 멀리까지 응원하러 온 ‘마포 김사장’이 고마워 연방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내는 부스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다 ‘이미지걸스’라는 독립출판물을 발견하고 책을 샀다. 셀카를 찍어 SNS에 올리는 젊은 여성의 심리를 당사자끼리 고찰하고 진지하게 토론하는 장면을 빼곡하게 담은 멋진 책이었다.
안온북스 대표인 서효인 시인도 만났다. 아내는 집에서 가져간 서 시인의 책 ‘잘 왔어 우리 딸’을 꺼내 사인을 받았다. 내가 최진영의 소설집 ‘쓰게 될 것’을 보내준다고 해 기다리다가 안 오길래 여기서 지금 샀다며 웃었더니 서 시인이 죄송하다면서 김중혁 작가의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를 선물로 줬다. 마침 김중혁 작가가 부스에 있길래 사인도 받았다. 아내가 비닐로 밀봉된 7만원짜리 중고책을 한 권 샀다. 배희한 목수의 ‘이제 이 조선톱도 녹이 슬었네’였다. 너무 비싼 거 아닌가 했지만 흔쾌히 사자고 했다. 나도 4만원이 넘는 ‘대사극장’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나중에 인터넷 중고서점에 가보니 아내가 산 책은 13만원에 거래되고 있었다. 오예!).
음식에 관심이 많은 아내가 ‘모던키친’이라는 책을 샀다. 소설을 좋아하는 내가 ‘군산초단편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샀다. 글쓰기와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두 사람은 팀 잉골드가 쓴 ‘라인스(선의 인류학)’라는 책을 사는 데 합의했다. 자동차 트렁크가 묵직해지도록 책을 샀다. 북페어 가서 구경만 하고 오자는 말은 역시 헛된 다짐이었다. 책 좋아하는 분들은 제발 북페어 같은 데 가지 마세요. 가산탕진의 지름길입니다. 아, 지름길. 그러고 보니 우리 이번 달에도 너무 질렀네.
편성준 작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민희진 “하이브와의 소송비 23억…집 팔아서라도 마련”
- ‘5060 경계병 법안’ 성일종 “나이 들면 잠 없어…고용 창출 효과”
- ‘괘씸죄 계속’ 유승준, 대법원 승소에도 한국행 무산
- 공수처, ‘김건희 공천개입 의혹’ 채상병 수사 착수
- “만취해 기억 안 나”… ‘순천 10대 살해’ 30대 구속영장
- 이재명 “내가 구약성경 다 외운다 했으면 징역 5년 구형했을 것”
- 올해도 세수 30兆 펑크… 진단·대응 총체적 오류
- 마약동아리, 대학 밖에도 퍼졌다… 대형병원 의사는 투약 후 7명 수술
- ‘전기차 캐즘’ 폭탄에 SK온 출범 첫 희망퇴직·무급휴직
- “나는 아동납치범이 아닙니다”… 아동반환청구 소송 급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