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통일을 포기하더라도

박지훈,미션탐사부 2024. 9. 28.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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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훈 미션탐사부 차장


시인 백석의 작품들을 처음 읽은 것도 벌써 20년 저편의 일이 됐다. 그 시절 나는 백석이 남긴 유명한 절창들 사이에서 잠시 서성였을 뿐 그의 작품에 완전히 빠져들진 못했었다. 곧바로 해석되지 않는 서북 방언은 넘기 힘든 허들처럼 느껴졌고 흥건한 향토적 분위기는 취향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시들은 당대의 한국어 문학이 물리는 느낌을 줄 때면 내가 가장 먼저 찾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그가 시집 ‘사슴’(1936) 출간 이후 내놓은, 이른바 ‘북방 시편’으로 불리는 작품들은 한국시의 영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시작부터 난데없이 재북 작가 백석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최근 정치권에서 오가는 통일에 관한 이야기들 때문이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19일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에서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자”고 했다. 한때 통일투사였던 이가 이런 주장을 내놓으니 어떤 이들은 당혹스러워하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에 수긍하는 듯한 모습이다.

여기에서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진 않다. 다만 통일을 포기하자는 식의 이야기에 호응하는 사람이 제법 많은 것을 확인하니 머지않은 미래에는 한국 사회에서 통일에 관한 논쟁 자체가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때가 되면 북한 땅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질 일들이 온전히 남의 일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북한의 전체주의가 망가뜨린 백석의 인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도 줄어들 것이고 백석의 작품을 향유하는 독자의 규모도 크게 쪼그라들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과거 북한의 작가들이 겪은 좌절, 그중에서도 백석의 삶에는 꾸준히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북한의 전체주의가 그의 문학에 남긴 더러운 얼룩과, 그 나라의 희한한 체제가 결딴낸 한 시인의 문학 세계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현대사의 아픔을 되새길 수 있다고, 그런 관심이 모일 때 평화의 밑돌도 생길 거라고.

알려졌다시피 백석은 우직한 작가였다.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고종석은 과거 백석을 다룬 한 산문에서 백석이 ‘북의 시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남한에서 읽히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적었다. “그가 북쪽에 남음으로써 한국문학사는 ‘정치적으로 올발랐던 미당’을 가질 기회를 잃었다”고. 실제로 백석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사의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지 않았고 부역 행위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다. 이런 그가 분단 이후 북녘땅에서 내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가 걸머졌을 절망의 무게를 짐작하게 된다. 백석은 동갑내기 지도자인 김일성을 찬양하고 엉터리 체제를 선전해야 했다. 기괴하고도 민망한 작품들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그는 마흔일곱 살이던 1959년 북한에서도 가장 추운 삼수군으로 쫓겨나 96년 세상을 등질 때까지 글을 쓰지 않고 양치기로 살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렇게 역사는 백석이라는 걸출한 작가를 빼앗아갔다.

최근 한 일간지에는 시인 8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가 실렸다. 지난 100년간 발표된 한국 시집 가운데 으뜸가는 작품은 무엇인지, 최고의 시인은 누구인지, 첫손에 꼽을 만한 시는 무엇인지 묻는 내용이었다. 이 조사에서 백석은 두루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시집 ‘사슴’은 가장 많은 표를 받았고 ‘가장 좋아하는 시인 5명’을 꼽는 문항에서도 백석은 김수영과 함께 1위를 차지했다. ‘가장 좋아하는 국내 시’를 물었을 때도 백석의 시는 8편이나 언급됐다. 그중 해방 공간에서 백석이 발표한 마지막 작품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가 통일을 포기하고 살아갈 먼 훗날에도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과거 이렇게 평가했었다. 백석의 시들이야말로 한국문학의 북극성이라고.

박지훈 미션탐사부 차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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