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되어 순국한 의병장을 모신 군사의 마음

정만진 2024. 9. 2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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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15] 9월 27일 타계한 이진영 지사

[정만진 기자]

 (왼쪽부터) 경북 구미 해평면 산양리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제창 마을' 기념비, 문경 이강년기념관, 광주 광산구 박호동 '박산 의병 마을' 표지석
ⓒ 정만진
1930년 9월 27일 이진영(李鎭榮) 지사가 타계했다. 본적이 경북 예천군 화장면(현 문경시 산북면) 지내리 363번지인 지사는 1849년 7월 25일 출생했다. 타계시 향년 81세였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어느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는 일제 치하였고, 모시던 이강년 의병장이 22년 전 일제에 체포돼 교수형으로 순국했기 때문이다.

58세나 된 고령에 이강년 의병군 참여

1907년 이진영 지사는 58세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강년 의진에 참여해 좌종사(坐從事)로 복무했다. 이강년 의병장은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하고 을미사변 때에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지역민과 아주 친숙한 인물이었다.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한 이강년 의병군은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주진위대 해산병을 주축으로 결성된 민긍호 의진과 합세해 충주성을 공략하고, 추치 전투, 죽령 전투, 고리평 전투, 백자동 전투 등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고종은 밀지를 내려 이강년 의병장을 도체찰사(都體察使, 요즘의 비상계엄사령관에 해당)에 임명해 독려했다. 이강년 의병장은 지역민들의 절대적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 1908년 2∼4월 용소동 전투, 갈기동 전투, 백담사 전투, 안동 서벽 전투, 봉화 내성 전투, 안동 재산 전투 등에서 많은 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6월 청풍 작성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우리나라 의병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살펴본다

이진영 지사를 추념하는 뜻에서 우리나라 의병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짚어본다. 가장 오래된 의병은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 가장 유명한 의병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의령), 정인홍(합천), 김면(고령) , 고경명(광주), 유팽로(옥과), 김천일(나주) , 조헌(옥천) , 휴정(묘향산), 유정(관동) 등 무수한 인물들이 떠오르는 임진왜란 의병일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조선 지도층은 국가 경영을 허술하게 해 마침내 나라를 망국의 수렁에 빠뜨렸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1905년 을사늑약(일본에 외교권 피탈)에 반발해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1907년(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국가 통치권 대부분을 일본에 빼앗긴 정미7조약과 한국군 강제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군의 전투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소규모 의병군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정규군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1910년(경술국치) 이후 의병활동은 차차 소멸되고, 만주, 러시아, 구미 지역 등으로 망명해 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구한말 의병이 곧 독립운동의 기틀을 놓은 분들인 것이다.

이진영 지사와 한마을에 살았던 이규해 지사

의병과 독립군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할 때 지연, 혈연, 학연 등이 연결고리로 작동했음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광주 광산구 박호동 입구 '박산 의병 마을' 비석과, 경북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 입구 '기미년 대한독립만세 제창 마을' 기념비 등은 그같은 공동체 정신의 표상이다.

이진영 지사가 살았던 마을은 경주이씨 집성촌이었다. 이진영 지사의 본적지 지내리 363번지 지척의 지내리 267번지에 그보다 19세 연하 이규해 지사가 살았다. 이규해(李圭海, 1868-1947) 지사 역시 이강년 의진에 투신해 일본군과 싸웠다. 인근 용궁면 이지선(李芝璇, 1876-1918) 지사도 이강년 의진에 들어 일본군과 싸웠다.

세 분은 최후의 청풍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피체되지 않고 겨우 살아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이진영 지사는 이미 59세 노인이었고, 이지선 지사는 48세, 이규해 지사는 40세였으니 청년은 아니었다.

세 분은 이강년 의병장의 한많은 순국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장의 아들 이승재(李承宰, 1873-1910)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다가 투옥되고, 다른 죄수들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하지만 분을 참지 못해 결국 피를 토하며 죽는 것도 보았다.

이지선 지사는 1918년 42세에, 이진영 지사는 1930년 81세에, 이규해 지사는 1947년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진영 지사와 이규해 지사는 당시 평균수명으로 볼 때 천수를 누렸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어찌 그것이 하늘이 준 복이었겠는가!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여생을 보냈을 그분들의 명복을 늦게나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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