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작품이 한국 아동문학에 있다는 게 고맙다
우수한 아동 문학을 소개합니다. 어른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동 문학을 통해 우리 아동 문학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문학 속에 깃든 아이들의 마음과 어른의 모습을 들여다 봅니다. <기자말>
[최혜정 기자]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라고 말하면 어떤 내용이었는지보다 소설의 '분량'을 먼저 떠올린다.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이런 류의 소설을 큰 강을 의미하는 대하(大河)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마치 수많은 강의 생물과 강 주위의 생명들을 품고 지키는 거대한 강줄기처럼 소설이 품고 있는 시대적 배경과 사회·문화적 의미가 높고, 방대하다. 그래서 대하소설의 매력은 '깊고 풍부하다'.
실감 나는 시대 배경과 그에 적절한 인물들, 그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선들이 그 많은 분량의 압박을 이기고도 기꺼이 책을 놓지 않고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드는 이유다.
바람이 된 조선의 아이, 해풍이와 만나게 되는 <나는 바람이다> 역시 그런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읽으며 시대를 거슬러 조선으로 달려가고, 기필코 아버지를 찾겠다는 해풍이의 절절한 마음에 빠져들게 된다.
아이들뿐이랴. 함께 읽는 어른들까지 1권을 샀다면 다음 권을, 또 다음 권을 사지 않을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김남중은 이 이야기에 '바다'를 담았다고 한다. 고작 지구의 30프로인 땅덩어리에 살며, 지구의 70프로인 바다를 간과하며 살아간 우리들에게 드넓은 바다 세상을 펼쳐낸다.
1653년 (효종4년)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하멜'과 그의 동료들,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이 사건이 <나는 바람이다>의 배경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유명한 작가 김남중은 직접 발로 뛰며 하멜의 자취를 찾고, 그 결과를 이야기 속에 담았다.
그는 여수에서 나가사키까지 직접 범선을 타고 항해했고,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 쿠바,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직접 답사하고 취재하여 이 대서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원고지 4500매, 사진 자료 6000장, 삽화 400컷 등 엄청난 양의 자료를 쏟아부은 프로젝트가 이 작품이다.
▲ 나는 바람이다 1 - 빨간 수염 사나이 하멜 일공일삼 85, 김남중(지은이), 강전희(그림) |
ⓒ 비룡소 |
아버지의 부재로 몰락해 가는 가정을 보며 '모험'을 결정하는 태풍이의 모습은 폐쇄적이고, 운명적인 조선 사회를 깨부수는 폭풍과 같은 사건이었다. 태풍이는 삶은 독자에게 그저 땀을 식혀주는 가벼운 산들바람이 아니라 바다를 따라 드넓은 세계로 몰아치는 태풍의 씨앗이었다.
<나는 바람이다>의 1권은 슬픔, 가난, 운명, 그 어느 것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한 현실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태풍이는 이름 그대로 바람이다. 조선을 탈출하여 나가사키로 향하는 하멜 일행의 배에 기꺼이 올라타 알지 못하는 세계로 휘몰아쳐 간다.
<나는 바람이다>는 총 11권 5부로 구성된 소설이다. 1부는 조선을 떠나는 태풍이를 2부는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3부는 아버지와 다시 헤어져 하멜 일행과 네델란드로 가게 되는 이야기, 4부는 쿠바를 거쳐 멕시코까지 가게 된 이야기, 5부는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 태풍이를 볼 수 있다.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태풍이는 죽을 고비도 몇 차례 넘기며 갖은 고생을 한다.
그러나 어려울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태풍이를 보며 어린 독자들은 의지를 배우고 꿈을 키우게 된다. 태풍이의 길을 함께 따라가는 어른 독자들은 잘못된 관행을 만나고, 부당한 정부를 만나고, 제국주의의 야욕을 만나며, 욕심으로 가득한 부끄러운 어른을 만나기도 한다. 태풍이 때문에 가슴 아프고, 태풍이 덕분에 설레며, 태풍이로 인해 아이건 어른이건 독자들은 모두 희망을 놓지 않는 이의 용기와 꿈을 볼 수 있게 된다. 독자들에게 태풍이는 몰아치는 바람이며, 꿈꾸는 바람이 된다.
▲ <나는 바람이다> 속 한 장면. |
ⓒ 비룡소 |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올리는 '조선 표류 보고서'였던 '하멜 표류기'를 읽어보면 반드시 네델란드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는 함께 했던 선원들을 잃고 제주에 표류해서도, 한양으로 불려 가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다시 전라도로 유배되어 힘든 삶을 살면서도 기록하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기록은 네델란드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 기록이었으며, 결국 그의 의지는 현실이 된다.
인조때 먼저 표류했던 네달란드인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하여 조선의 훈련도감에서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 속 박연은 하멜을 향해 희망을 버리라 말한다. 한 번 들어오면 벗어나기 힘든 땅이 조선이라 이야기한다. 하지만 하멜은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기에 결국 돌아갈 수 있었다.
박연의 경우, 당시 북벌과 쇄국정책, 아시아 정세 등 시대적 혼란 때문에 외교적으로 처리하기가 매우 힘들어 귀화하게 되었다는 고증도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안주'를 택한 것이고, 하멜은 '모험'을 택한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에 그의 시간과 용기를 바쳤기에 하멜의 삶은 고향으로 귀환하여 회복될 수 있었다.
태풍이도 그랬다.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책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한 권, 두 권 책이 쌓일수록, 태풍이의 숨 막히는 모험은 독자를 사로잡는다.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심장을 오그라뜨린다. 전투에 휘말리고, 괴혈병에 걸리고, 해적선의 습격을 받는 등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파란만장하다.
하지만 <나는 바람이다>에는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희망은 현실이 된다고 말하는 하멜과 태풍이가 있다.
▲ <나는 바람이다> 전권 |
ⓒ 비룡소 |
아이들의 책 읽기 호흡이 그리 길지 않기에 에피소드식 장편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열심히 써도 독자가 읽기에 힘든 책이라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김남중의 <나는 바람이다>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다'고 자신할 정도로 이 이야기는 몰입도가 있고 재미있다.
인터넷 서점은 대상 연령을 3~4학년, 5~6학년이라고 분류해 놓았지만, 청소년이 읽어도 시시하지 않다. 아이들의 이야기라 희망적이고 착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 뭔가 심심할 것 같지만, 드라마 소재로 써도 될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 곳곳에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는 '팩션'이기도 하다.
<나는 바람이다>의 1권이 나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 이만한 어린이 혹은 청소년 대하소설을 나는 보지 못했다. 태풍이의 이야기가 희망, 성장, 꿈과 같은 전형적인 아동 성장 소설의 코드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식상하지 않다.
<나는 바람이다>가 보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자꾸만 책을 들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작가 김남중의 시간과 열정, 치열한 진심이 빚어낸 작품이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공장의 물건 찍어내듯이 고만고만한 이야기가 넘치는 세상에 보기 드물게 정성이 들어간 이런 작품이 아동문학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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