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줄 알았는데 막장... 영앤리치와 그 친구들의 추락
[김성호 기자]
한때 '아시아에 네 마리 용이 있다'는 말이 돌았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아래 전 세계 국가가 양쪽 진영으로 갈라져 힘겨루기를 벌인 냉전이 반세기 동안이나 세계 정치와 경제를 집어삼켰다. 냉전에서 승리를 거둔 자유주의 세계의 동맹국들은 이 기간 동안 커다란 경제적 성장을 이루는데, 특히 아시아의 네 개 국가가 유독 큰 성취를 거두었다.
용으로 비유됐던 이들 네 개 나라는 한국을 비롯해 대만과 홍콩, 싱가포르다. 일본 외엔 이렇다 할 경제강국이 없던 아시아에서 이들 네 개 나라는 저마다의 장점을 살려 신흥공업국이며 무역강국으로 입지를 확고히 했다.
특히 대만은 네 마리 용 가운데 가장 앞줄에 서는 국가로 꼽혔다. 반도체와 이동통신, 전자산업 등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을 여럿 배출했고, 중국에 대항하는 산업국가로 서구로부터 든든한 지원까지 받았다. 경쟁력 있는 산업을 바탕으로 자국민의 삶의 질 또한 크게 향상됐고, 서양식 교육을 받은 세대의 자유로운 발상이며 태도가 발전의 또 다른 동력이 됐다.
대만의 경제성장이 정점에 달해 있던 때가 바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국가와 산업 전반에서 중추로 올라서며 경제적 과실이 사회전반으로 파고들던 때다.
자유분방한 세대가 만들어가는 문화며 예술 또한 대만 사회 전반을 전과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갔다. 전통과 역사, 대륙의 수복이란 과제를 꿈꾸던 옛 문화가 차츰 자리를 비워가고 오늘을 즐기는 새로운 풍토가 급격하게 가지를 쳤다. 통일을 비롯한 역사적 과업, 또 지역과 공동체, 전통적 가치를 외치는 젊은층이 사실상 소실된 오늘의 한국의 상황과 얼마 다르지 않은 상황이랄까.
▲ 독립시대 스틸컷 |
ⓒ 에이썸픽쳐스 |
에드워드 양이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던 1990년대 중반,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 가운데 <독립시대>가 있다. 제작 30년 만인 2024년 한국에서 재개봉하게 된 이 영화는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을 만큼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특히 대만 젊은이들의 도시화된 삶의 양태와 변화한 가치관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다뤄 관심을 모았다.
주인공은 대만 타이페이에서 사는 청년들이다. 부잣집 딸로 홍보기획사 대표로 사업을 벌이고 있는 몰리(금연령 분)는 소위 말하는 영앤리치, 돈 많고 잘 나가는 젊은이다. 부유한 약혼자 아킴(왕백삼 분)이 있고, 일에서도 승승장구하니 모두가 그를 우러르며 따른다.
그러던 어느 날 몰리의 삶에 악재가 닥쳐온다. 몰리의 예술가 친구 버디(예밍 왕 분)가 준비하던 연극이 표절시비에 걸리는 게 그 시작이다. 단짝친구이자 비서인 치치(진상기 분)가 이를 맡아 수습하지만 만만치는 않은 모양이다. 그 와중에 치치의 애인이자 치치와 몰리의 오랜 친구 샤오밍(진이문 분)은 몰리의 회사에서 해고까지 당한다. 사소한 이유로 샤오밍을 해고한 몰리는 치치와의 사이에도 균열을 겪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아킴까지 그녀의 사생활을 의심하니 몰리는 될 대로 되라고 막나가기 시작한다. 청춘들의 열망과 욕망, 낭만과 속물적인 선택들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야기는 마침내 도달할 목적지로 흘러가는 것이다.
▲ 독립시대 스틸컷 |
ⓒ 에이썸픽쳐스 |
각자의 사연을 품은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보여주는 과정이 상당히 산만한 인상을 남긴다. 빠르게 지나가는 사건과 대사들은 이들이 처한 각기 다른 상황과 고민을 알도록 한다. 그 가운데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경제와 체제, 불평등과 정치, 예술과 자본주의, 그 사이사이 묻어 있는 불공정과 위선의 문제가 에드워드 양의 관심인 듯하다. 하나하나 깊이 뜯어볼 시간을 주지 않는 편집이 도리어 현대사회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 바쁘기만 하다.
간간이 드러나는 속물적이고 비겁한 인간 군상은 마침내 단짝친구의 짝을 빼앗고, 남의 작품을 훔치고, 다른 이의 돈을 몰래 탐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러고도 제 잘못을 깨우치지 못하니 처음엔 자유롭고 화려하게 보였던 이들의 모습이 어느 순간 추잡하고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 독립시대 스틸컷 |
ⓒ 에이썸픽쳐스 |
애인인 샤오밍과의 관계에서 은근히 껄끄러운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치치와 소설가의 사이에선 미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소설가는 마침내 치치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고, 치치는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온다. 택시를 잡아탄 치치의 뒤에서 소설가가 맹렬하게 달려온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따라잡은 순간, 그는 깨달음을 얻은 듯 뜬금없는 소리를 한바탕 내어놓는다.
세상 모든 것에 새로운 면이 있고 그걸 매일 발견한다면 얼마나 즐겁겠느냐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희망이 어디에나 있다는 걸, 가식을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이 아니라 진솔하게 사는 것이란 걸 알려야 하겠다고. 진리가 어디에나 있는데 공자가 왜 필요하고 흉내를 내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진짜가 없으면 가짜가 있겠느냐고. 가짜가 있으니 서로 오해하고 의심하고 환상을 품는 거라고. 진리를 깨달았을 땐 재능은 사라지고 없으리라고. 낭만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고, 비극의 시대도 끝났고, 이제부터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읊조리며 떠나는 소설가를 뒤로하고 치치는 가만히 앉아 전보다 선명히 눈을 뜬다.
▲ 독립시대 포스터 |
ⓒ 에이썸픽쳐스 |
그 결과 1992년 중국은 대만과의 사이에 92공식, 즉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해석과 표현을 각자에게 맡긴다는 큰 틀에서의 합의를 도출하기에 이른다. 오늘날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합의에 대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자유로운 세대는 강한 저항감을 드러낸다. 반면 역사적이고 민족적 의지와 의식을 가진 옛 세대는 이를 반겼다. 마침 홍콩의 반환까지 이어진 1990년대의 중화권 상황 가운데 하나의 중국보다는 독립과 자유를 꿈꾸는 새로운 움직임을 에드워드 양은 문화적, 예술적으로 표출하려 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독립시대>를 빼어난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울 수 있다. 너무 많은 캐릭터와 다듬어지지 않은 구성이 보는 이를 혼란케 하고, 주제의식 또한 뚜렷하게 이것이다 말하기 쉽지 않은 탓이다. 그러나 도시와 자본주의,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이 열어가는 새로운 시대상 가운데서 변치 않아야 할 본질과 가치를 은근히 드러내고 있단 건 분명하다 하겠다. 그 모두가 모여 다시 한 나라와 사회의 정체성을 이루니, 대만의 오늘과 <독립시대>가 결코 따로 있지는 않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