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세태취재 | 시공 초월한 한복 사랑
“BTS도 블랙핑크도 입은 한복, 나도 입어볼까”_박세나
외국인에게 한복 체험 인기… K-팝 스타처럼 한복 입고 궁궐 나들이
전통vs 퓨전, 한복 취향은 다르지만 글로벌한 힙 아이템으로 급부상
추석을 일주일 앞둔 9월 첫째 주말,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월대에는 색색의 고운 한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제강점기 때 허물어진 이후 100년 만에 복원된 월대를 거쳐 경복궁으로 들어가려는 시민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렸기 때문이다. 유료(성인 기준 3000원) 입장이 원칙인 경복궁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에겐 무료 개방된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종묘, 조선왕릉까지 한복을 착용한 관람자들에겐 무료 입장 혜택이 주어진다. 국가유산청이 문화유산인 한복을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시행 중인 문화혜택 중 하나다. 궁과 능에 무료입장 혜택이 있다 보니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한복 입기 체험은 일석이조의 인기 아이템이다. 한국 여행의 기념으로 한복도 입어보고, 한국의 궁궐과 조선왕릉까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 근정전을 배경으로 친구와 사진을 찍고 있던 베트남 관광객 흐엉(28) 씨는 K-팝(K-pop)이 좋아 한국 여행을 결심했다. 그는 “유튜브 영상으로 뉴진스가 경복궁에서 공연한 걸 봤는데, 미니드레스 같은 한복이 정말 인상깊었다”면서 “한국에 오면 꼭 경복궁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 찍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게 됐다”고 기뻐했다. 경회루 인근에서는 무리 지어 다니는 한복 차림의 몽골인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정부기관에서 개최한 세미나에 초청받아 단체 방문했다는 난살마(36) 씨는 “오늘 오전 세미나 공식 프로그램이 모두 끝나서 동료들과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으로 궁궐 투어를 택했다”면서 “이왕이면 한복을 입고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라는 말과 함께 휴대폰 카메라 버튼을 연신 누르며 즐거워했다.
K-팝과 K-드라마 열풍이 한복 사랑으로
경복궁에서 만난 흐엉 씨와 난살마 씨처럼 외국인들이 한복에 큰 관심을 갖게 된 데는 K-팝 가수들과 K-드라마의 영향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방탄소년단(BTS)이 노래 ‘아이돌(IDOL)’의 뮤직비디오에서 도포와 갓을 착용한 것을 본 BTS 팬클럽인 전 세계 아미들과 세계인들이 한복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사극 [킹덤]에서 갓을 쓴 채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좀비와 싸우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등장했다. 당시 세계인들은 SNS에 ‘갓’에 대해 무수히 많은 질문을 남겼고, 각자 알아낸 내용들을 공유했다. 갓 사진과 함께 ‘코리안 햇’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업로드하며 힙한 패션 아이템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2020년 6월 걸그룹 블랙핑크가 미국 NBC TV ‘지미 팰런쇼’에서 한복을 입고 신곡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을 선보였다. 그 무대 직후 구글의 ‘hanbok(한복)’ 검색량이 그 당시 1년 중 가장 많은 수치를 기록할 정도였다.
한복뿐 아니라 K-팝 가수들이 공연 무대로 삼은 궁궐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공간에도 관심이 높아졌다. 올해 5월 국가유산청 출범을 기념해 경복궁에서 열린 ‘2024 코리아 온 스테이지-뉴 제너레이션’ 공연에 걸그룹 뉴진스가 한복을 입고 근정전에서 스페셜 무대를 펼치며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이에 앞서 2020년 9월에 이미 BTS가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한복 차림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전까지 근정전 일대에서 대중가수의 공연이 펼쳐진 건 1954년 경복궁 개방 이후 한 손으로 꼽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근정전이 조선시대 국가 의식을 거행하던 공간이자 건물 자체가 국보로 지정된 국가유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BTS는 근정전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부르고 경회루에서는 ‘소우주’를, 숭례문 앞에서는 ‘버터’를 불렀다. 이 공연은 미국 ‘지미 팰런 쇼’를 통해 전 세계에 방송됐다. 이때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한국의 문화유산인 궁궐 등이 자연스레 노출되면서 한국 여행 시 꼭 가봐야 할 ‘성지’가 됐다.
여기에 청와대가 일반인에 개방되면서 한복 차림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경복궁에 이어 청와대까지 한 번에 들르기 시작했다. 경복궁 신무문을 통해 나오면 바로 청와대 정문이 보이는 까닭이다. 최근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선 한복을 차려 입고 광화문을 통해 무료로 입장한 뒤, 경복궁을 둘러보고, 신무문으로 나와 청와대까지 한꺼번에 둘러보는 코스가 인기다.
외국인 관광객 맞춤형 한복 대여로 취향 저격
경복궁역 인근에서 한복대여점을 운영하고 있는 50대 김모 씨는 “코로나 때 버티지 못해 문을 닫은 가게들도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요즘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면서 “전통 한복보다 퓨전 한복이 더 인기가 많은데, 주변에 경쟁가게들이 몰려 있다 보니 나만의 노하우도 필요해졌다”라고 했다. 김씨는 “단순히 한복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 손님에겐 도포뿐만 아니라 갓을 함께 추천하고, 여자 손님은 자기 스타일대로 저고리를 고르면 그에 맞는 모양과 색상의 치마를 추천해주고 있다”면서 “특히 젊은 여성의 경우 머리를 땋아 댕기를 달아주거나 떨잠 같은 머리 장식품을 꽂아주면 추가금이 붙어도 다 좋아한다”라고 노하우를 소개했다.
김씨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한복대여점의 주요 고객은 중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점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몽골 등 동남아 관광객이 많아졌고, 최근엔 중앙아시아나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그러다 보니 관광객 취향에 맞춰 대여용 한복과 장신구들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퀄리티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 다만 퓨전한복이라는 이름으로 중국풍으로 디자인된 옷, 저고리가 없이 어깨를 드러낸 치마나 상하의가 연결된 원피스 스타일의 한복은 취급하지 않는다. 국가유산청에서도 이런 형태는 ‘한복의 정의’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무료 입장의 혜택에 제약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궁능 무료 입장을 위해서는 전통한복, 퓨전한복, 모던한복, 생활한복 모두 가능하지만, 반드시 저고리에 치마 또는 바지를 갖춰 입어야 ‘한복’으로 인정된다. 티셔츠와 청바지 등 평상복에 두루마기만 걸친 것도 무료 입장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제약은 일각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복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세계적인 한복 디자이너 고(故) 이영희 선생이 1993년 파리 패션쇼에서 저고리 없이 어깨를 드러낸 채 치마만 두른 드레스 형태를 선보였던 때를 예로 들기도 한다. 당시 현지 언론을 비롯해 세계 패션업계에선 한복을 ‘바람의 옷’이라 부르며 찬사를 보냈던 반면, 국내에선 전통을 훼손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후 ‘전통 한복에 대한 정의’와 ‘보존과 개선’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국내에선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에겐 한복은 한번쯤 입어보고 싶은 아름다운 한국 전통 의상일 뿐이어서 한복 열풍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정부도 참여형 한복 프로그램 대폭 확대
전문가들은 무대 위 가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에 따라 휘감기거나 펼쳐지는 한복의 아름다움과 외국인에겐 이국적인 한국의 건축물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의상을 디자인한 금기숙 전통복식 연구가는 우리 한복에 대해 “움직임과 생명력, 자연의 에너지를 수용하는 것이 한복의 특징”이라며 “저고리 끈인 고름과 치마가 날리거나 족두리의 떨새와 노리개 등에서 율동미가 느껴지는데, 이런 부분이 일본의 기모노나 중국의 치파오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최근의 이런 한복 열풍에 정부에서도 적극 지원에 나섰다. 지난 2022년 ‘한복생활’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한 데 이어, 최근엔 내·외국인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한복 체험과 강연 등 참여형 한복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특히 요즘 MZ세대와 외국인 관광객들의 ‘궁궐 한복 체험’이 우리 전통문화를 향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는 만큼, 궁궐에서 한복을 입고 전통문화를 즐기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박세나 월간중앙 기자 park.sen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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