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ESV, 유감스런 연비에도 이유있는 명성
'SUV 제왕' 다운 압도적 존재감
3열까지 꽉 채워도 쾌적한 승차감
수많은 플래그십 SUV(스포츠유틸리티 차량)가 도전장을 내미는 요즘이지만,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여전히 이름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한다. 수입차 브랜드를 통틀어 에스컬레이드를 제압할 수 있는 차량을 생각하자면 좀처럼 경쟁자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커다란 덩치와 럭셔리 브랜드에 걸맞는 가격 탓에 국내에서 판매량으로 승부하긴 어렵지만, 여전히 명성이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3열까지 인원을 꽉꽉 채우고 에스컬레이드의 롱바디 모델을 직접 시승해봤다.
서울에서부터 충남 태안을 찍고 돌아오는 약 350km의 코스로, 서울 시내에서부터 고속도로와 좁은 시골길까지 두루 달려봤다. 시승모델은 에스컬레이드 ESV 프리미엄 럭셔리 플래티넘 트림으로, 가격은 1억6900만원이다.
'이걸 운전할 수 있을까?' 운전 경력 10년 차, 자동차를 취재하는 기자로서 한 덩치 한다는 차들을 두루 겪어봤지만, 에스컬레이드 ESV를 마주하니 초보였던 때의 기분이 맥없이 되살아났다. 5명을 태우고 이동해야하는 탓에 일부러 롱바디 모델을 택했건만, 불편하더라도 기본 모델을 시승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커다란 덩치는 운전 좀 한다는 누굴 데려다놔도 일단 손사래부터 치게 만들기 충분하다. 본닛의 높이는 어깨와 비등할 정도로 키가 크고, 사이드미러는 얼굴만하다. 1억 7000만원의 가격은 말하지 않아도 가까이 다가서면 절로 체감이 되면서 조수석에 탑승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커진다. 엄청난 압도감이다.
벌크업을 제대로한 몸집만 문제가 아니다. 에스컬레이드 ESV는 얼굴도 우락부락하니 거칠고 사납게 생겼다. 수평으로 거칠게 뻗은 양쪽 헤드램프 사이에는 캐딜락 로고와 함께 커다란 그릴이 자리하는데, 웬만한 자동차 그릴 두 세개는 합쳐놓은 것 만큼 면적이 넓다.
터프하게 생겼지만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건, 양쪽 헤드램프 아래로 뻗은 수직형 주간 주행등(DRL)이 캐딜락의 아이덴티티를 살려주기 때문인 듯 하다. 덕분에 럭셔리한 우락부락한 근육을 품고 있지만, 점잖게 수트를 차려 입은 신사같다.
얼굴에서 느껴지던 압도감은 측면으로 돌아서니 배가됐다. ESV 모델이라는 걸 알고 봐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길다. 상조회사에서 쓰는 차처럼 뒤를 잡고 최대한 늘려놓은 모습이다.
실제로 5세대 모델로 바뀌면서 에스컬레이드 ESV의 전장은 전작 대비 385mm 길어진 5765mm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달성했고, 휠베이스도 전작 대비 336mm 길어진 3407mm로 국내 출시된 SUV 모델 중 가장 긴 모델로 기록됐다.
수직으로 툭 떨어지며 거대한 냉장고 같은 후면은 캐딜락 시그니처 디자인으로 세련되게 완성했다. 번호판 위 캐딜락 엠블럼을 누르면 트렁크가 열리게 디자인 됐고, 후면 램프는 뒷판의 면적이 꽤 많이 남는데도 불구하고 중앙을 침범하지 않는다. 엠블럼을 가로지르는 긴 크롬 디자인과 수직으로 크게 뻗은 리어램프가 심심할 뻔한 후면을 조화롭게 채우는 모습이다.
이 거대한 몸뚱이를 어떻게 채웠을까. 내부로 들어서니 깔끔하고 정제된 고급스러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판을 밟지 않고 한번에 올라탈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한 높이 탓에 버스에 올라타는 듯한 느낌이지만, 시트에 앉고나면 플래그십 SUV의 세련됨이 탑승객을 곧바로 만족시킨다.
에스컬레이드 ESV의 내부는 캐딜락 특유의 투박한 미국 감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됐다. 출시된 지 4년째를 맞는 모델이지만, 지난 주에 출시됐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특히 업계 최초로 적용된 38인치 LG 커브드 OLED 디스플레이가 최신 감성을 내는 데 톡톡히 한 몫을 한다. 이 디스플레이는 운전석부터 중앙까지 길게 이어진 형태인데, 덕분에 운전석에서 연비 등 스티어링휠을 이용해야하는 주요 정보들도 터치로 조작이 가능하다. 계기판은 스티어링휠 바로 뒤에 작게 하나 더 배치되면서 확실한 경계를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기어노브와 주요 기능은 기존 방식으로 살리면서 급작스러운 변화는 피했다. 실내 공간이 넓은 만큼 비상등, 공조 버튼 등을 켤때는 손을 더 길게 뻗어야하는데, 물리버튼이 기어노브 앞쪽에 위치하면서 운전 중엔 오히려 편리하게 조작이 가능했다. 짧은 팔로도 재빠르게 비상등을 켤 수 있었던 비결이다.
대시보드와 도어트림 등에 디자인 요소로 들어간 나무 마감재는 고급감을 살려주는 요소다. 나뭇결 무늬만 낸 게 아니라 진짜 나무가 사용돼 점잖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다만 젊은이들에게는 아빠차를 빌려와 끌고 있는 듯한 올드한 느낌이 들 수 있겠다.
에스컬레이드 ESV의 가치는 1열 뿐 아니라 2열, 3열 탑승객에게도 고루 만족감을 준다는 데 있다. 보통 3열까지 제공하는 준대형, 대형 SUV들이 1열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을 후석까지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에스컬레이드 ESV는 후석에서도 플래그십 모델을 타고 있다는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2열시트는 2개의 단일 좌석으로 마련돼있는데, 1열 시트 뒷면에 디스플레이가 하나씩 달려있어 장거리 운행에도 지루하지 않게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긴 전장과 박스형태의 뒷태 덕에 2열 만큼이나 3열에서도 훌륭한 헤드룸과 레그룸은 말할 것도 없다.
3열까지 시트가 꽉꽉 들어찼음에도 불구하고 트렁크 공간도 넉넉하다. 캐리어 2개와 종이 박스 4개를 포함한 각종 짐을 트렁크에 모두 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쉬움 없이 넉넉했다. 시트를 평평하게 젖혀 누울 수도 있는데, 이쯤 되니 집 한 채를 끌고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달리기 실력은 어떨까. 에스컬레이드 ESV에는 최고출력 426 마력, 최대토크 63.6kg·m의 6.2L V8 가솔린 직분사 엔진, 10단 자동 변속기가 탑재됐다.
2870kg에 달하는 공차 중량에 성인 여성 6명과 짐까지 가득 실은 탓에 힘이 달릴까 우려했지만, 에스컬레이드 ESV는 디젤이 아니라 가솔린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힘겨운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보란듯이 쭉쭉 뻗어나갔다.
100km 이상의 고속 구간에서도 풍절음 하나 없이 조용하다. 굉음이나 흔들림 없이 조용하고 안정적인 실내는 V8 엔진의 강력한 힘을 몸소 체감하게 만들었다. 시동을 걸 때 경쾌하고 묵직한 엔진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전기차인가 싶은 의구심이 들었을 듯 하다.
커다란 몸집과 길게 뻗은 전장에도 운전이 어렵지 않단 점은 최대 장점이다. 어라운드 뷰 덕에 주차나 좁은 길에서도 운전이 수월했고, 전자식 리미티드 슬립 디퍼런셜이 탑재된 덕에 휠의 구동력이 자동으로 제어돼 코너링 시에도 쏠림 없이 안정적인 승차감이 유지됐다.
300km를 내달리고 나서 확인한 연비는 4.3km/L. 고속도로 정속 주행시에는 8km/L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 차를 타면서 얻은 만족감을 생각하면 연비까지 기대하는 건 욕심이다.
시승을 마치고 나니, 하이브리드가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 여전히 '바닥에 기름을 뿌리고 다니는' 수준의 연비에도 불구하고 'SUV 제왕' 수식어가 붙는 이유를 단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2억에 가까운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수입차는 무수히 많지만, 에스컬레이드 ESV와 비슷한 감성을 줄 수 있는 차는 전무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급 세단이나 스포츠카의 영역에서는 가질 수 없는 넓은 공간과 몸집에서 오는 압도감, 차에 탄 모든 이들에 편안함을 선사하는 것. 여기에 길에서 자주 볼 수 없는 희소성은 에스컬레이드의 시대를 연장시키기에 충분해보인다.
▲타깃
-넓은 공간이 필요한데, 럭셔리 차는 대부분 세단이라 불평했던 당신
-길에 널린 SUV 말고 특별하고 럭셔리한 SUV를 원했다면
▲주의할 점
-웬만한 주차장은 당신을 받아줄 여력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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