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논개 바위, 항일 현장 촉석루…진주는 자부심이었다

2024. 9. 2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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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그린 화가들


김인혜 미술사가
18세기에 나온 책 『택리지』에서 이중환은 경상남도 진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로 장수와 정승을 많이 배출했다. 토지가 비옥한 데다 강산의 풍광도 빼어나서 사대부들이 부유함을 자랑하여 저택과 누정(누각과 정자) 가꾸기를 즐겼다. 이들은 설령 벼슬을 하지 않아도 잘 노는 귀공자(한량, 閑良)라는 이름은 떨치고 있다.”

땅이 기름져서 똑같은 면적에 농작물을 재배해도 그 생산량이 타지역의 몇 배나 높았다는 데가 진주였다. 남강이 마을을 돌아 감으니 물이 풍부하고, 배를 통한 물자 수송도 편리했다. 마을 뒤에는 이름도 비범한 비봉산(飛鳳山)이 있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지리산에서 풍부한 자원을 제공받으며, 남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가면 금방 사천 아래 바다를 만나게 된다. 두루 물자가 풍족하여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 풍류를 즐기는 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기생 문화도 격조가 있었다. 북에 평양 기생이 있다면, 남에는 진주 기생을 높이 쳤다.

「 항일 전통, 풍광 빼어난 예향
후원자 많고 기생문화도 격조

이건희 기증한 변관식 ‘진양성’
남강서 바라본 진주성 파노라마

박생광 항상 논개 바위 눈에 띄게
파리의 이성자 그림 제목이 ‘진주’

변관식의 1957년작, ‘진양성’,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남강에서 진주성을 바라본 풍경을 효과적으로 재현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기념사업회]

그런 마을에 어찌 예술가들이 드나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주를 ‘예향(藝鄕)’이라 한다. 일반 대중이 일상에서 예술을 즐기고, 예술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깃든 고을. 그런 곳에 화가들이 나고 머물렀던 것은 당연했다.

변관식 머릿속의 진주성 그려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은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경성에서 성장했지만, 진주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의 표현대로 “영원한 여인과 절승(절경)을 찾아서” 방랑하기에 진주만큼 적합한 곳이 또 있으랴. 기생이 있고, 경치가 빼어나며, 격조 높은 한량, 다시 말해 ‘후원자’도 많았다. 나중에 변관식은 진주의 여인과 재혼했다. 기막히게 음식을 잘 만드는 여인이었다.

진주의 절승이라면 단연 진주성을 꼽을 것이다. 변관식이 그린 진주성 그림은 1929년부터 나오기 시작하는데, 1950년대에 특히 여러 점을 그렸다. 변관식 하면 흔히 ‘금강산의 화가’로 기억되는데, 그가 금강산 다음으로 많이 그린 단일 소재가 진주성이 아닐지.

박생광의 1980년작 ‘촉석루’, 개인소장. 박생광은 촉석루 외에도 북장대, 뒤벼리, 진주 팔경 등 진주의 풍광을 담은 작품을 여럿 남겼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기념사업회]

그중에서도 1957년 부산에서 그렸다는 제발(題跋, 제사와 발문)이 있는 ‘진양성(=진주성)’은 고(故) 이건희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으로, 6폭 병풍에 공들여 그린 역작이다. 진주가 고향인 사람이 의뢰한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진주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실로 대단한데, 그 자부심의 중심에 바로 이 진주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이 이끈 군사 6000여 명이 왜군 3만여 명을 물리친 곳이니 말이다. 우리 군대는 많은 부분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의병에 의존했는데, 이들이 성 밖으로 돌을 던지고 가마솥 끓인 물을 부어가며 결사 항전한 현장이 진주성이었다. 왜군은 진주에서의 설욕을 갚고자 작정하고 2차 침공을 가했는데, 이때 무려 6만여 명의 조선군과 민간인이 몰살당한 현장도 같은 곳이다. 2차 진주성 전투 패배 후 의기(義妓, 의로운 기생)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논개가 뛰어든 바위, ‘의암(義巖, 의로운 바위)’이 지금도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변관식의 진주성 그림은 어떤 점에서 사진보다 더 효과적으로 풍경의 지형지물을 표현했다. 남강에서 바라본 진주성의 파노라마가 웅장하게 펼쳐진 가운데, 우리나라 삼대 누각 중 하나인 촉석루, 그리고 그 왼쪽에 논개를 기리는 사당인 의기사(義妓祠)가 또렷이 보인다. 논개 이야기를 기록한 석비(石碑)가 의암 바로 위에 자리 잡았고, 남강 위 의암은 특히 새까맣게 그려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재미있는 것은, 1957년 변관식이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진주성은 이런 모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진주는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도 군사적 요충지였던 나머지, 6·25 전쟁이 터졌을 때 낙동강 방어선 사수를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UN군의 융단 폭격이 퍼부어지면서, 천년 고도 진주가 극심한 타격을 입었고, 진주성의 촉석루와 의기사 같은 목조 건물은 대부분 불탔다. 촉석루가 진주시민의 성금으로 재건된 것은 1960년. 그러니까 이 풍경은 변관식이 머릿속에서 기억되고 가공된 모습의 진주성이다. 당시로써는 파괴되고 훼손되었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모습으로서의 진주성 말이다.

진주 문화계 이끈 박생광

박생광의 또 다른 ‘촉석루’,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기념사업회]

진주에서 태어나고 묻힌 화가로 내고(乃古) 박생광(1904~1985)이 있었다. 진주공립농업학교(현 진주산업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약 20년간 체류하며 미술을 공부했다. 해방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와 진주 대안동에 정착했는데, 부인이 이곳에 청동다방을 운영하여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예술가들이 다방을 열었던 선례는 많았다. 시인 이상이 서울 종로에 제비다방을 열었고, 화가 이인성이 대구에 아르스(ARS) 다방을 열었다면, 박생광은 진주에 청동다방을 열었던 것.

이성자의 1960년작, ‘진주’,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화가가 진주시에 기증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기념사업회]

이들이 원했던 대로, 다방은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1949년 박생광은 이 청동다방에서 시인 설창수, 서예가이자 의곡사 주지였던 청남 오제봉 등과 함께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를 처음 발족했다. 이들은 전후(戰後) 진주의 문화적 자부심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일례로 진주성의 의기사 앞에는 설창수가 글을 짓고, 오제봉이 글씨를 쓴 비석이 서 있다. 박생광은 논개의 순절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각색한 그림 ‘의랑순국지도(義娘殉國之圖)’를 그리기도 했다.

박생광은 변관식과 마찬가지로 촉석루가 보이는 진주성 모습도 여러 차례 그렸다. 그는 실로 어떠한 대상도 어떠한 양식으로든 소화할 수 있는 대단한 기술력을 지닌 화가였다. 그가 그린 촉석루 중 어떤 것은 색채를 가미해 아스라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가 하면, 또 다른 촉석루는 검은 먹을 묵직하게 써서 기운차고 생동감 넘친다. 다만, 어떤 경우에라도 박생광의 촉석루 그림에서 남강 위 의암은 특별히 눈에 띄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박생광이 말하고 싶은 것을 이 의암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주 출신 이성자 파리에서 인정

진주성 아래에 있는 의암. 논개가 왜장을 끌어 안고 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사진 국가유산청]

진주의 여인 이성자(1918~2009)는 한 발짝 더 나갔다.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미 파리로 날아가서, 프랑스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일신여고보(현 진주여고) 출신인 그의 진주 사랑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GS그룹 창업주 허만정 회장이 설립 자금을 댔던 학교 일신여고보는, 일제강점기 여성 교육에 앞장섰던 선구적 명문이었다. 이성자가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세계적인 문학가들의 책을 모조리 빌려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야는 일찌감치 높고 넓고 때로는 거의 초월적이었다.

이성자는 1950~60년대 파리 예술계에다 한국과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한국의 오랜 목판화 전통을 현대화한 작품을 제작했다. 1964년 목판화 개인전을 당시 파리 최고의 갤러리(샤르팡티에)에서 열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기생 황진이의 시조를 한글로 새기고 찍어 발표하기도 했다.

남강에서 바라본 촉석루. [사진 국가유산청]

그리고 아예 제목이 ‘진주’(1960)인 작품을 파리에서 그렸다. 하늘인지 강물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옅은 푸른색이 가장자리를 두른 땅. 겹겹이 세월과 지층이 더해진 흔적. 전체적으로 애틋하고 따사롭고 아득히 아름다운 곳. 그것이 이성자가 그린 ‘진주’였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고향이 그립고 그래서 슬프지 않으냐고 한 프랑스 친구가 물어보자,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고 대답했던 자존심 강한 화가 이성자. 그는 말년에 작품 367점을 진주시에 기증했고, 진주시는 2015년 ‘이성자미술관’을 지어주었다. 현재 진주 충무공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글을 맺으려니, 진주인들의 비난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진주에는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예술가가 있는데, 왜 그들은 언급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진주의 그림 이야기만 해도 한없이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개인 사정으로 이 연재는 여기서 그만두게 되었다. 지금까지 애독해 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김인혜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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