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백의 아트다이어리] AI 시대의 미술, 어떻게 볼 것인가?

2024. 9. 2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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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세상에는 어느 영역이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다. 모조 사이에 보석이 있고, 가라지 가운데 알곡이 있다. 보통 가짜는 많고 진짜는 적다. 본래 그런 것이니 세상이 왜 그렇게 돌아가냐고 한탄할 일은 아닌 듯싶다. 문제는 옥석을 가리고 가라지를 솎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다. 대체로 가짜일수록 더 화려하고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때문이다.

「 AI가 쏟아내는 화려한 이미지
인간 주체의 극심한 분열 초래
오늘의 예술가들에 닥친 질문

딥페이크 일러스트. 셔터스톡


우리는 매일 30억 개 이상의 새로운 이미지가 나온다고 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더구나 소셜미디어 사용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이미지가 시각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엄청나다. 첨단 AI와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하루가 다르게 생생하고 리얼한 이미지를 생성해내며 그 자극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아주 나쁜 경우로는 인간의 눈이 갖는 추악한 욕망을 이용해 인권을 짓밟는 딥페이크 범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어두운 세계가 아니더라도 첨단의 디지털 이미지는 일상적 소통을 위한 SNS와 시각문화 전반에 침투해 있다. 그리고 예술의 영역에서도 이젠 예외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뿐 아니라 우리 눈의 빠른 순응력이다.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AI가 침범할 수 없는 유일한 영역이 예술이라는 여론이 대세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 요청만 하면 AI가 존 레넌 생전에 출시하지 못했던 곡을 그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특정 화가의 작품 스타일을 흉내 내 훌륭한 이미지로 제작해낸다. 미술의 경우 페이크는 인간의 감각 중 특히 시각을 공략하는데 우리의 ‘순진한’ 눈은 자극적이고 화려한 것에 이끌리기 쉽기에, 넋 놓고 있다 보면 어느새 휩쓸리기 십상이다.

19세기 전반까지 인기를 끌었던 무대 공연 ‘판타스마고리아’는 현대에 인간이 만든 산물인데도 그것이 물신화되고 우상화되어 도리어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상적 표상의 뜻으로 쓰인다. 북산


자본주의의 작동과 소비문화의 환상적 속성을 묘사하는 개념으로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라는 말이 있다. 인간이 만든 산물인데도 그것이 물신화되고 우상화되어 도리어 인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상적 표상을 말한다. 이는 환상적 영화나 꿈, 그리고 유령처럼 사람의 눈에 집단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양상을 역사적으로 조명한 이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다. 그는 19세기 파리를 중심으로 유리와 철, 그리고 전기의 발명이 가져온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어떻게 대도시를 사는 개인의 삶과 시각에 혁명을 가져왔는가를 분석했다.

상상해 보라. 전기 빛과 그 현란한 반사를 삶의 공간에서 처음 경험했을 눈의 충격을. 칠흑같이 깜깜했던 도시의 밤이 전깃불로 환히 밝혀지고 온갖 상품이 진열된 유리 윈도를 따라가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체험했을 경이감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백화점의 전신인 대도시 아케이드가 구현한 판타스마고리아는 모던 사회의 집단적 꿈이자 시각의 유령이었다. 대도시 모던 주체의 눈은 쇼윈도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보며 시각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체험을 했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시각적 스펙터클이 만들어낸 환상과 꿈의 세계를 탐닉했던 것이다. 20세기 전반의 벤야민은 이제는 폐허가 된 파리의 아케이드들을 찾아다니며 1세기 전 일어났던 일을 분석해 냈다.

파리의 슈아절 아케이드(Passage Choiseul), 1820년대. MIT Press

오늘날 AI가 보여주는 가상 세계는 실재 세계를 비웃듯 다채롭고 화려하게 펼쳐진다. 우리 시대의 판타스마고리아. 이 놀라운 시각의 세계에서는 이제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가 있다. 그건 갈수록 커지고 넓어지는 리얼리티의 세계와 가상 세계 사이의 갭이다. 우리의 눈이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보다 AI가 보여주는 환상적 이미지의 유령 세계에만 빠져든다면 인간 주체의 극심한 분열을 불러올 것이 확실해 보인다. 눈의 환영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의 물리적 한계는 정체성과 자아의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디지털 혁명의 판타스마고리아는 그리스 신화의 메두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구든 메두사와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을 잃어버리듯, AI가 보여주는 완벽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환상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현실 세계로부터 소외되거나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디지털로 제작한 자연의 이미지는 숲에 핀 실제 꽃의 색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화려하게 만들며 눈에 보이지 않는 생태계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가시화한다.

그렇게 영원히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AI 미디어 작품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환호하는 것이 군중의 심리이다. 오늘의 예술가는 지금 거대한 리바이어던과 같은 AI의 질문 앞에 서 있다. ‘예술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질문은 동시에 관객에게도 주어진다. ‘당신은 어떻게 볼 것인가?’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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