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리믹싱 세익스피어] 사랑하기 위해 헤어지겠다는 사랑도 사랑인가

2024. 9. 2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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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내가 그대의 가치를 점잖게 노래할 수 있을까,

그대는 나의 부분, 그것도 더 나은 부분인데?
나 자신을 향한 나의 찬미라면 무슨 소용이겠나,
내가 그댈 찬미하는 건 자화자찬이 될 뿐인데?
이것 때문에라도 우린 떨어져 지내는 게 낫겠어
우리 귀한 사랑, 하나라는 영예 잃는 게 낫겠어
이렇게 분리되면 그 덕에 내가 줄 수도 있겠지
오직 그대만이 홀로 누려 마땅한 찬미를 말야,
오 이별이여, 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 될까,
네가 준 쓰디쓴 여유가 달디단 허가를 내주어서
내가 사랑을 생각하는 일로 시간 달랠 수 없고
내 생각과 시간 그토록 달콤하게 속일 수 없다면,
또 여기 없는 사람을 여기서 찬미하게 함으로써
하나를 둘로 만드는 법 네가 가르치지 않는다면!
소네트 39 (신형철 옮김)

일러스트=김지윤 기자

33번에서 42번에 이르는 ‘불화 소네트’ 중에서 한 편 더 읽는다. 소네트 39는 (우리가 건너뛴) 소네트 36과 짝을 이루는 시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라임까지 상당 부분 같다. 이 정도면 ‘더블 소네트’라고 해도 좋다. 이웃해 있어야 자연스러웠을 시들이다. 그래서 혹자는 36번과 39번 사이에 두 편의 시가 끼어든 것은 출판업자의 편집 실수가 아닌가 추정한다. 시인이 일부러 두 편을 떨어뜨려 놓았을 거라고 짐작하는 이도 있다. 라임까지 ‘재활용’한 건 감추고 싶었을 거라는 이유로 말이다. 어차피 비슷하면 둘 다 다룰 필요는 없겠다. 36번보다는 39번이 더 강렬하다.


나와 한 몸 그대 찬미는 자화자찬


이 시를 다루는 거의 모든 학자가 다음 문구를 언급한다. “친구는 제2의 자기다.”(아리스토텔레스) 자기들도 비슷한 관계라고 화자는 생각한다. ‘당신은 나의 일부다.’ 그러니까 한 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찬미하는 건 자화자찬에 불과한, 볼썽사나운 일 아닌가. 그래서 상대방을 찬미하고 싶은 나머지 둘 사이에 분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 이별이라면 고통이 아니라는 식이다. 그대 생각을 실컷 할 수 있고 마음껏 찬미할 수 있으니 그 시간은 달콤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일반인의 상식은 머쓱해진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가 둘이 되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역발상.

헬렌 벤들러는 이 시가 어떤 가상의 원본을 거꾸로 다시 쓴 버전 같다고 지적하는데 그럴듯한 생각이다. 그가 ‘그림자-시’ 혹은 ‘유령-시’라고 부르는 원본의 내용은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다. “나는 우리의 이별이 증오스럽다. 그런데 이 이별에도 어떤 유익이 있을까? 그래, 사람들 눈에 우리가 덜 가까워 보일 때 나는 그를 더 당당하게 찬미할 자격을 얻는 거지. 좋아, 그런 이유로 난 이 이별을 승인하기로 한다.” 감정의 실제 순서는 이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반대다. 이별을 견디기 위해 찬미라도 하자는 마음을, 찬미하기 위해서라도 이별함 직하다는 마음으로 뒤집어 놓은 버전이다.

왜 이런 마음의 곡예가 필요했을까. 제 앞에 닥친 납득할 수 없는 이별을 납득 가능한 것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면 무엇일까. 전반부에선 늘 그렇듯이 ‘그대’를 청자로 이야기하던 화자가 9행부턴 ‘이별’ 자체를 향해 말을 걸기 시작하는 건 그럴 만한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나와 내 이별 사이의 관계지 그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대야 어떻건 나는 내 이별을 설득해야(속여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이 내겐 나쁘지 않다고 말이다. 이 시의 그림자이자 유령인 것은 이 몸부림이고, 이것까지를 포함해야 이 시가 완성된다. 그게 아니라면 이 (나쁜 의미로) ‘논리 정연한’ 시에서 어떤 감흥이 일어나기나 했을까.


이별의 유익이 궤변은 아냐


재치 있는 논평자 돈 패터슨은 이 자기기만 속에도 나름의 진실이 있다고, 이별의 유익을 말하는 게 궤변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우린 모두 그게 뭔지 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주는 유일한 보상은 그 사람에 대해 정신없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곁에 있을 땐 할 수 없는 그일 말이다.” 심지어 그는 상대방 때문에 짜증이 나서, 그 사람에 대한 백일몽에 다시 빠질 수 있게, 그이가 어서 돌아가 주길 고대했던 때도 있다고 고백한다. 그런 다음 그가 덧붙이는 다음 문장엔 누구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열병에 빠져 있을 때, 우리가 사랑하는 건 사랑이지 연인이 아니다.”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는 말은, 헤어질 수 있을 만큼만 사랑한다는 뜻의, 속이 투명한 변명이지만, ‘사랑하기 위해 헤어진다’는 말은 좀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되묻자면, 그렇게 해서 가능해지는 그게 사랑인가? 돈 패터슨의 표현을 재활용해서 반문하자면, 사랑을 사랑하는 건 사랑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당연하고 그래서 이상한 문장을 여기에 한 번 적기로 하자.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다.’ 물론 거기엔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스럽지 않아 난감한 드문 시간도 세금으로 포함돼 있다. 돈 패터슨이 이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말할 것도 없고.

「 O! How thy worth with manners may I sing,
When thou art all the better part of me?

What can mine own praise to mine own self bring?

And what is’t but mine own when I praise thee?

Even for this, let us divided live,

And our dear love lose name of single one,

That by this separation I may give

That due to thee which thou deserv’st alone.

O absence! what a torment wouldst thou prove,

Were it not thy sour leisure gave sweet leave,

To entertain the time with thoughts of love,

Which time and thoughts so sweetly doth deceive,

And that thou teachest how to make one twain,

By praising him here who doth hence remain.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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