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 MZ인데요, 솔직히 김삼순이 너무 얄밉습니다
[정누리 기자]
'노처녀' 직장인이 갑자기 동년배 친구가 돼 나타났다. <내 이름은 김삼순 2024> 얘기다.
지난 6일 <내 이름은 김삼순>이 리마스터링돼 새롭게 공개됐다. 다소 불필요한 장면들은 일부 편집하고, 화질을 개선했다.
난 이번에 이 작품을 처음 접했다. 2005년 10살이었던 난 당시 결혼을 갈망하며 선 보러 다니는 여주인공보다는 <궁>이나 <꽃보다 남자> 같은 순정학원물에 빠져 있었다. 어느덧 나 자신이 '30살을 앞둔 미혼 직장인 김삼순'이 된 지금이야말로 이 드라마를 이해하기 가장 적절한 시기 아닐까. 우리는 좋은 타이밍에 만났다.
▲ <내 이름은 김삼순 2024> 화면 갈무리 |
ⓒ 웨이브 |
바꿔 생각해보면 그만큼 강산이 많이 변했다. 내가 '고작' 결혼이라고 말하는 이 인생 과제는 삼순이의 고급 스펙을 모두 깡그리 지워버릴 정도로 중대한 문제였다. 무언가 이룬 것도 없는데 결정해야 하는 나이 '서른'은 지금도 여전하다.
20년 전 그녀의 중대사가 결혼이었다면 내게는 '직장'이다. 신입으로서 받아주는 나이를 넘기 전에 얼른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 생각은 서른을 앞두고 급속도로 불어났다. 드라마 초반, 극중 현진헌(현빈)이 김삼순에게 계약연애를 하자고 할 때 그녀는 이렇게 거절한다. "난 초년운이 좋지 못해 사장님처럼 태평양을 유람선 타고 갈 처지가 안된다고. 그러니까 서른 셋까지는 내 짝을 만나 태평양을 건너고 싶다고요." 이 대사에서 난 '내 짝'이 '일자리'로 바뀌었을 뿐, 우리가 불안한 사회인이라는 점에선 똑같다. 우리는 여전히 삼순이다.
이런 면에서 삼순이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가장 큰 강점은 좋은 학벌도, 서울 자가 주택도, 유창한 불어도 아니다. '소통 능력'이다. 그녀는 제과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미세한 상황의 온도를 잘 읽는다. 삼순이의 언어는 의뭉스럽지 않다. 좋은 것은 좋다, 싫은 것은 싫다고 정확히 말한다.
삼순이를 좋아하면서 애처럼 틱틱거리는 현진헌에게 '네 마음을 제대로 직시하라'고 조언한다. 약혼녀가 있으면서 자꾸 자신에게 연락하는 전 남자친구 민현우에게도 '그럼 지금 약혼녀에게 전화를 걸어줄 테니 당장 승부를 보라'며 연락한다.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아 거식증에 걸린 유희진(정려원)에게 '내가 미안해서 그렇다'며 죽을 끓여 주기도 한다.
한국어를 못 하는 헨리 킴도, 실어증에 걸린 어린 아이 미주도 모두 삼순이와는 말이 통한다. 자기 분에 이기지 못하고 불같이 역정을 내는 현진헌도, 그간의 사정을 말하지 않고 속내를 차갑게 감추는 유희진도 김삼순을 통해 마음의 온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워간다.
살다 보면 서로 한국어를 하는 게 맞는지 의심되는 순간들이 있다. 프로젝트 책임을 가지고 싸우는 회사 동료들, 결혼이나 출산 등의 주제로 어른들과 떠드는 순간이 그렇고, 일촉즉발 남북전쟁 등의 정치 뉴스를 볼 때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삼순이는 내가 그리던 30살 어른의 모습이다.
▲ <내 이름은 김삼순 2024> 화면 갈무리 |
ⓒ 웨이브 |
그러나 드라마 초반의 삼순이는 자신의 촌스러운 이름을 숨기기 급급하다. 대충 이름 지어준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고, 직장 동료들에게 '김희진'이라고 본인의 이름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자기 본명을 들켰을 때는 또 과하게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라며 본명이 새겨진 명찰로 갈아 끼운다.
주변 사람들도 그에 놀라지 않고 "삼순이가 뭐 어때서? 귀엽기만 한데"라는 말을 던지고 밥 먹기 바쁘다. 되레 폭로한 사람이 무안해질 정도다. 삼순이건 희진이건 아무도 이름을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약점은 내 마음에 있다. 이 사실을 삼순이는 전후반에 거쳐 깨닫는다. 성장 과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 이후로도 그녀가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 자랑스러운 이름이라며 굳이 김삼순 석자를 자랑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아무렇지도 않아 할 뿐이다. 그것이 가장 큰 성장이다.
그녀의 결핍이 이름이었다면 내게는 '학벌'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도 어디서나 당당한 성격이지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요소들은 감추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들어갔다. 글이나 콘텐츠 창작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딱히 내신 관리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정 공부가 더 하고 싶으면 대학원을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일반 4년제 대학교가 아닌 국립 원격대학을 택했다.
정작 사회에 나와보니 학력 얘기를 할 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데 나 혼자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선택 사유를 구구절절 말할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왠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나 정작 얘기를 털어놔 보면, 다들 이 선택을 재밌어 할 뿐이었다. 누군가는 '너답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내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남들은 나만큼 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약점은 내 생각이 만든다.
▲ <내 이름은 김삼순 2024> 화면 갈무리 |
ⓒ 웨이브 |
현진헌의 대사 또한 순한 맛이 되면서 이에 맞받아치는 삼순이의 매력이 조금 약해진 듯하다. 구시대적인 언행에 반박하는 삼순이의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큰 매력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시청자들이 내놓는 다양한 담론이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다. 기존의 팬층과 새로운 유입층의 토론이 이곳저곳에서 보인다. 그만큼 이 캐릭터들이 세대적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뜻이리라.
▲ < 내 이름은 김삼순> 리마스터링판 포스터 |
ⓒ wav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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