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설거지하며 버틴 시간... '사극 퀸'의 고백
[이준목 기자]
"벼랑 끝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중고 신인이었으니까. 일이 들어오지 않아 알바를 많이 했다. 스무 살 때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주변에서 다들 '이래도 괜찮아'라고 물어봤다. 다른 것들에 개의치 말고 중요한 것만 생각하려고 했다."
지난 25일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배우 이세영이 아역에서 성인배우로 성장하던 시절의 슬럼프를 고백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
그동안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던 이세영이지만 특히 <옷소매 붉은 끝동>, <열녀박시 계약결혼뎐>을 통하여 쪽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사극퀸', '확신의 중전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세영은 인상적이었던 별명으로 '인간수묵담채화'를 꼽았다. 이어 "어떤 기자님이 그런 표현을 썼다. 그 이후 친언니가 전화해 '여보세요, 인간 수묵담채화님'이라고 놀렸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또 다른 별명은 이세영의 연기 경력이 오래된 것을 빗댄 '선생님'이 있었다.
최근 이세영은 신작인 로맨스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서 일본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와 한일 커플로 호흡을 맞췄다. 전작인 <열녀박씨> 종방연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 새벽부터 일본어 레슨을 받는 등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고 한다.
이세영은 쉴 시간이 주어지면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와 손흥민의 경기를 즐겨본다며 축구 찐팬의 면모를 드러냈다. 야무진 성격만큼이나 의외의 면모도 많은 이세영은 특유의 엉뚱한 성격으로 생긴 일화를 털어놓았다. 온라인 마켓에서 활동하다가 쥐를 잡아달라는 누리꾼의 요청을 보고 마스크를 쓰고 정체를 숨긴 채 찾아가 만 원을 받기도 했다. 한번 꽂힌 음식을 매일 먹다가 이후 몇 년은 아예 끊기도 했다. 최근에는 괴담 이야기에 푹 빠져 매니아가 된 사연들을 털어놓으며 반전의 4차원 매력을 과시했다.
이세영은 드라마 제목과 같은 '사랑후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죽음'이라는 범상치 않은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하지 않나. 죽을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세영은 자신이 사랑하는 스타일을 '멈추지 않은 8톤 트럭'에 비유했다. 이어 "브레이크 없이 직진하지만, 그래도 상대를 배려하면서 하는 편"이라며 "그렇지만 도망치거나 숨지는 않는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신호를 조금씩 주면서 티를 내는 편"이라며 거침없는 사랑꾼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세영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미모로 어른들의 칭찬을 받았고, 주변에서 방송에 출연해 보라는 권유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는 유괴 사건이 많았던 시절이라 이세영의 부모님은 딸이 방송에서 얼굴이 알려지면 그나마 덜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역 활동을 시키기 시작했다.
재연 프로그램 출연을 통하여 연기를 시작한 이세영은 수시로 울고 보채는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의젓하고 야무진 성격으로 낯선 현장에서도 잘 적응했다. 같은 시기에 아역으로 활동해 성공적인 성인배우로 성장한 친구로 박은빈을 꼽았다. 성인이 되어서 다시 만난 후에는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으며 꾸준히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이세영의 아역 시절 대표작이자 사극 불패 전설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대장금>이다. 여기서 이세영은 주인공 장금의 라이벌인 금영(홍리나의 아역)을 연기하며 주목 받았다. 이세영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홍시'라고 불렀다. 학교에 가면 남자친구들이 '오나라(대장금의 OST 주제가)를 부르면서 놀리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장금>은 이세영에게 뜻하지 않은 아픈 추억을 남겼다. 이세영과 가장 친했던 친구가 온라인에서 안티 카페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들킨 것이다. 심지어 해당 친구는 이세영에게 사과한 후에도 안티카페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세영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 방송 장면 갈무리 |
ⓒ tvN |
하지만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더 이상 전교 1등을 하기 어려워졌고, 175cm 이상으로 클 것이라고 믿었던 신체적 성장도 멈추면서 이세영은 처음으로 현실을 자각했다. 이세영은 "빠르게 현실을 인식했던 것 같다. 한때는 모든 게 잘될 줄 알았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얻어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전했다.
수많은 아역 출신 배우들이 그러하듯, 이세영 역시 아역에서 데뷔해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슬럼프의 시기를 겪었다. 2015년 대학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던 이세영은 일이 없어 생활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이에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하루 8잔씩 에스프레소를 마셔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어렵게 캐스팅된 작품의 지방 촬영 때문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대구를 오가는 강행군도 이어갔다. 또 성인이 된 이후 본인의 연기에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고 연기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당시를 돌아보며 이세영은 "방향성을 잡으려고 노력했던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또 일이 들어오지 않자 소속사 사무실에 매일 찾아가 출근 도장을 찍은 일화도 털어놨다. 사무실에서 설거지하고 컵을 씻는 자질구레한 일도 도맡았다. 잘나가던 아역 시절의 과거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포기하지 않는 이세영의 적극성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무명시절이 길었던 유재석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며 이세영의 노력에 감탄했다.
사무실에 이세영만을 위한 전용 책상이 마련될 정도였다. 이세영은 "주된 목적은 제 존재감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스무 명이 넘는 소속사 배우 중에서 '나를 기억해달라'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때는 너무 불안했다. 하지만 불안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으니까. 무언가를 해야 바뀐다고 생각하고 버텼다"라고 말했다.
소속사에 작품 대본이라도 나오면 직원들에게 일부러 말을 걸며 '내가 할만한 배역은 없어?'라고 직접 문의하는가 하면 미팅과 오디션을 자청한 시절이었다. 이세영은 "항상 당당했던 것 같다. 제가 연기를 잘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나라는 배우를 권유한 것"이라며 "'잘, 열심히 해볼게요'라는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세영은 드라마 <화유기>의 '좀비녀'로 캐스팅됐다. 처음에는 캐릭터의 이름도 없는 작은 배역이었지만 이세영은 누구보다 열정을 보이며 제작진을 붙잡고 "하나라도 아쉬운 것 있으면 다 이야기해달라. 진짜 잘해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이후 이세영은 <월계수양복점신사들>, <왕이 된 남자>, <옷소매 붉은 끝동> 등 다수의 인기작에 출연하여 어엿한 성인 연기자이자 주연급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해외 팬들까지 대거 생겨났다는 이세영은 "이렇게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되나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 그래도 감사히 받아들이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이세영은 기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홍보할 때도 명함에 간식과 함께 자신의 극 중 배역을 새겨넣어 홍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이세영은 6살의 어린 세영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이따 뭐 먹을래?"라는 의외의 말을 전했다. 이세영은 "잘 하고 있다거나 힘을 내라는 이야기보다는 그냥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한다. 아마 6살 세영이도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고 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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