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유포하겠다는 남자 추적... 다큐로 만들다

최해린 2024. 9. 2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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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7회 여성인권영화제 FIWOM 개막작 <나의 가해자 추적기>

[최해린 기자]

제17회 여성인권영화제(FIWOM)의 개막식이 25일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에서 열렸다. 국내 여성인권 활동의 기둥이 돼 온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열린 이 영화제에서는 14개국 48편의 다채로운 영화들이 공개될 예정이다.

'우리는 마주 앉아서'라는 슬로건 아래 모인 수많은 영화 중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파트리시아 프랑케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가해자 추적기>였다. 노트북을 도둑맞은 후 '은밀한' 사진을 살포하겠다는 의문의 협박범에게 연락받은 여성이 자신의 가해자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감독 본인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이 영화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강력한 메시지를 응축해 놓았다.

가해자를 '내가' 잡아야 하는 이유
 영화 <나의 가해자 추적기> 스틸컷
ⓒ 가데아필름
노트북을 도둑맞고 지인들에게 협박범의 사진이 도착하기까지, 경찰을 비롯해 파트리시아를 도와야 할 당국은 무력하기만 하다. 협박범의 IP 주소도 파트리시아가 직접 알아내야만 했고, CCTV 확인을 비롯한 범죄자들의 신원 파악도 파트리시아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처럼 여성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상황에서, 개인은 아무런 시스템의 지원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가해자 추적기>는 이러한 암담한 현실을 기록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낸다. 바로 사건의 주도권을 휘어잡는 파트리시아 본인의 여정을 통해 절망 대신 희망을 선사하는 것이다. 작중 파트리시아는 이어지는 협박범의 메일에 계속 불안해하다가도, 그 사이사이에 가족이나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잠깐의 웃음을 되찾기도 한다.

이 연대는 어쩔 줄 몰라 하던 파트리시아가 이 사건을 영화적 기록으로 남기고, 가해자를 위해 직접 나서기로 한 계기가 된다. 개인의 입체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담음으로써 '힘없이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라는 '피해자다움'의 신화를 깨뜨린 것이다.

파트리시아의 마지막 수단은 협박범이 유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은밀한 사진들'을 메시지와 함께 스스로 공개하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찍은 '내 몸'을 통해 수치심을 주고자 한 협박범으로부터 신체적 자율성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이 담대한 조처에 가해자는 종적을 감추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건, 그렇기에 더 강력한 의의
 파트리시아 프랑케사 감독
ⓒ 여성인권영화제 FIWOM
<나의 가해자 추적기>는 사건이 발생한 2019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2024년 2월에야 노트북 도둑 중 한 명이 잡혔으며, 그 외의 사실은 전혀 밝혀진 바가 없음을 알려 주며 끝을 맺는다. 노트북 도둑과 협박범이 동일인인지, 서로 관련된 인물인지 등 중요한 정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파트리시아의 능동적인 행동으로 당장의 협박은 멈추었지만, 피해자 파트리시아의 불안과 두려움은 현재진행형이다. 개막작 상영 이후 이어진 파트리시아 프랑케사 감독과의 대담 '피움톡톡'에서 감독은 자신의 행동은 최선의 조치가 아닌 유일한 조치였으며, 앞으로 다른 여성들이 본인과 같은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의 고통에 무심한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임을 강조한다.

<나의 가해자 추적기>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일 것이다. 딥페이크 성범죄로 인해 분노한 한국의 여성 관객과 개인정보 탈취를 통한 '섹스토션' 협박으로 고통받는 스페인의 관객은 유사한 경험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파트리시아 프랑케사 감독 역시, 피움톡톡에서 '자신이 성범죄를 당했는지도 몰랐던 피해자들이 <나의 가해자 추적기>를 본 이후 핫라인에 연락해 도움을 구하게 된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다'라고 밝힌다.

<나의 가해자 추적기>는 화면 구성이나 편집 리듬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의 공개를 통해 파트리시아 개인의 피해담은 또다른 여성들을 한데 묶어 그들이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하는 구심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가해자 추적기>는 파괴적이다. 피해자들에게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는 동시에, '이런 영화가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며 사회적 변화를 촉구하는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제목의 힘
 영화 <나의 가해자 추적기> 포스터
ⓒ 가데아필름
마지막으로, 본작의 한국어 제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의 가해자 추적기>의 원제는 <My Sextortion Diary>로, 직역하면 <나의 섹스토션(성적 갈취) 기록> 정도가 된다. 작품의 핵심을 담아낸 제목이지만 본작의 역동성이나 파트리시아의 주체성을 고려하면 오히려 지나치게 무난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나의 가해자 추적기>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축사를 통해 17회 여성인권영화제의 서막을 연 어혜선 활동가의 말에서 그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주의적 번역과 글쓰기란 언어의 의미를 선점하는 전쟁입니다.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여성인권영화제 상영작들 또한 스크린에 펼쳐진 말의 전쟁터입니다."

관성적인 번역은 이야기의 본질을 해치기도 한다. 동등한 관계에 있더라도 여성 인물들의 대사는 전부 존댓말로, 남성 인물들의 대사는 전부 반말로 번역하는 행태가 아직도 국내의 수입작 자막에 만연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반면, 여성인권영화제의 번역작은 자막이 여성의 언어가 지닌 힘을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의 섹스토션 기록>이 <나의 가해자 추적기>라는 보다 강력하고 명확한 제목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래서 그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제17회 여성인권영화제 FIWOM은 9월 29일 일요일까지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에서 개최되며 온라인 예매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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